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김연수의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의 감상
‘이해’ 하기 어려운 관계들의 허망함
‘환한 빛, 따뜻한 날이 아니라 캄캄한 어둠, 서늘한 밤을 향해 지니는 애착’의 시간에 작품 속 화자는 ‘그녀에 대해 말해야겠다.’ 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환한 낮에는 차마 꺼내기 어려워 이야기 할 수 없던 것들도 밤에는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 어둠은 인간의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나면서도 부끄러움이 가려지는 이중의 시간이다. 바람 불고 비오는 한밤에 쓴 편지가 밝아진 낮에 다시 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 하게 되고 이메일의 발신취소 기능을 몹시 다행으로 여긴 경험...
이 작품의 화자는 왜 그런 밤에 ‘그녀’를 말하고 싶었을까?
‘그녀’는 화자와 동거해온 연상의 여인 세희의 자살한 여동생이다.
화자인 ‘나’는 일본인 역사학도로 영국에서 유학하며 세희와 동거하고 있었지만 서로 필요에 의한 관계이상이 아니다. ‘나’는 집세를 절약할 수 있고 세희는 외로웠을 것이다.
“언니는 당신 이름이 일본어로는 쥐를 뜻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나’에게 세영은 “당신들은 서로 이해하는 척 하지만 서로 아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서로 속이느라 삶을 허비하고 있어”라며 빈축을 보낸다. 함께 살면서도 이름의 의미도 모르는 관계의 허위, 소통의 부재다.
세영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남편은 ‘아이를 낳아야만 해’ 라고 말한다. 그러나 세영은 ‘조금만 더’ 라고 무심히 미루었고 어느 날 함께 탄 자동차 사고로 남편은 죽는다.
남편의 아이에 대한 소망은 위태로워진 관계의 암시였지만 세영은 남편을 알지 못했고 ‘평생 사랑하며 살 것 것으로만’ 믿었다가 남편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고백을 듣는다. 그리고 함께 타고 가던 자동차가 논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남편이 죽어 가는데도 가만히 앉아 ‘그 해 봄에 본 벚나무’를 생각하고 ‘벚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던’ 것을 생각하고 ‘바람 때문이라 기엔 너무 심하게 흔들린’ 탓이 ‘작은 새였을 거라’ 는 생각만 하며 방치(?)한다.
사람은 가끔 어떤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는 듯 한때가 있다.
그리고 느닷없이 아무 연관성도 없는 것 같은 어떤 장면들만 가득 채워지는 순간,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작은 새’가 벚나무를 흔들듯 세영이 남편의 운전대를 흔들어 사고를 자행 한 것은 아닌지? 배의 밑바닥 3등 객실에 갇혀서 절망적인 상태로 누워 몸이 흔들리는, 그저 흔들림뿐이었다는 그녀의 악몽에서 이 혐의는 짙어진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어서” 언니의 남자와 섹스를 한다.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감을 갖게 하는 일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어서’ ‘나’와 섹스를 한 그녀를 ‘나’ 또한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당연히 세희 또한 자신의 여동생과 섹스를 한 ‘나’를 이해하지 못하며 ‘나’는 세희
에게 쫓겨났고 이어 한국으로 돌아간 세영의 자살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여러 차례 ‘구멍’을 말한다.
‘자신만의 어두운 구멍 속으로 고립’ 과 겐로꾸 시대 가인 나이또오 죠오소오의 ‘봄비가 오네 빠져나온 그대로의 잠옷의 구멍’을 되새기고 ‘요기’의 그 어두운 구멍까지 이해하겠다는 건 결코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소망 이라고 말하며 소통의 한계, 관계의 허망함에 쓸쓸해 한다. 작중 등장인물들의 간결함 속에서 유독 등장하는 중국집 식당에서의 옆자리 사람들도 이혼한 부부였다. 이혼한 부부의 대화를 엿들은 날 세희는 ‘나’ 에게 자신을 ‘버리면 죽여버리겠다.’ 는 억지 선언으로 관계의 두려움을 표출한다. 그리고 일본말을 하나도 모르면서 일본인과 동거하는 언어소통의 부재도 이 작품이 말하는 관계의 어려움을 위한 장치인 듯하다.
그렇게 이 작품은 사람이 같이 살면서도 서로 얼마나 낯선 존재일 수 있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준다. 같이 사는 사람의 이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세희는 동생을 영국까지 불러들여 놓고도 동거 남자를 신뢰하지 못하여 과잉 제스츄어를 취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세영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남편이 절박하게 잡아보려던 ‘아이를 낳아야만’ 하는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남편을 죽게 하고 죄의식으로 악몽을 꾸며 언니의 동거남자와 섹스를 하고 언니의 허위를 비웃으며 자신은 자살하고 만다.
그리고 곧잘 어긋나는 세상사처럼 ‘나’는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세희가 아닌 세영을 사랑한 걸까?
‘나’는 ‘서로를 속이는 것도 속는 것도 없는 ‘요기’의 구멍과도 같은 밤’에 ‘그녀’의 이야기를 쓰면서 ‘자신이 연루되어 있는 과거의 기억들을 다루는 데 역사가가 더 불리한 입장에 있는 것 아닌가’ 라는 프랑스의 역사가 조르주 뒤비의 회고를 떠올린다.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편협함과 사실이해에 대한 한계를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렇듯 인간의 존재는 알 수 가 없다.
작가의 다른 작품 [모두에게 복된 새해]를 통해서도 언어를 달리하는 펀자브사람과의 소통의 문제가 주요 흐름으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점점 개인화 되어가는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진 사람사이의 소통부재를 쓸쓸해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작중 화자가 세희의 집 문을 ‘찰칵찰칵 차례로 잠그고 더 없이 깊은 밤과 꿈결처럼 아득한 어둠속으로’ 떠나듯 독자의 가슴에 허전한 길 하나 내어 ‘아득한 밤길’을 동행하게 한다.
2007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