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

미국의 '원더풀 아메리카' 의식.

공고지 2009. 9. 24. 10:17
 

‘원더풀 아메리카!’


- 법률과 기술력과 자본이 일체가 되어 노동의 상품화가 고도로 정교해지고 있는 아메리카의 도시는 잉여가 커지는 만큼 풍요로워지고 있었다. 유흥업소는 ‘과거도 없고, 추억도 미래도 희망도 없는 한없이 슬픈, 그렇지만 한없이 비정한’관현악대신 재즈밴드의 경쾌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웨스팅하우스전기회사가 운영하는 라디오방송국이 개국되었고 비행기에서 부활절 설교방송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여성도 흡연을 시작했고 스포츠가 풍부해지고 여성들의 스커트도 조금씩 짧아졌다. 포드자동차의 성공과 포드식 대량생산시스템은 환상적이었을 것이다.  ‘블랭크튼 창문틀’ 을 만들어내는 기업은 ‘이제 자유가 승리했으니, 이제 정의의 세력이 인류의 도덕을 재건하기 시작했으니, 세계는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물질적 과업에 직면해있다’ 고 광고했다. 볼세비키에 적대적인 분위기는 반공주의를 팽배하게 하였고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에 항의하는 노동계급의 파업은 울림이 약화되어갔다.

‘정상화’를 바라는 미국국민들은 승전과 기술문명의 발달, 미국 우월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주의적 우월의식으로 1등 아메리카를 꿈꾸었다. ‘미국사회의 행동을 결정짓는 최종적 권위는 번영이라는 이름으로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기업인 즉, 자본의 힘이었다. -


위의 글은 어느 수업에서 제츨한 레포트의 일부분입니다. ‘원더풀 아메리카’라는 책을 읽은 느낌이었는데요, 문득 이 글이 생각나 다시 옮겨온 것은, 미국의 'ism..'의 한 단면이 ‘이제 자유가 승리했으니 세계는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물질적 과업에 직면해있다’ 라고 한 위의 모 기업 광고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아서요. 마틴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문도 다시 한번 읽어보았는데 매우 감동적인 연설문 중에‘나는 아직 꿈이 있습니다. 이 꿈은 아메리칸 드림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꿈입니다.’ 라고 한 구절을 보며 미국인들은 철저히 ‘아메리칸 드림’, 즉 ‘국가주의’ 의 틀 안에서 사고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왜 그럴까요?

읽어 본 논문들에서는 미국서부 개척시대로부터 시작된 미국인들의 근원적 정서가 있고‘19세기 말 ’서부‘는 자유, 야성, 모험심 등으로 낭만적 이미지화 되면서 앵글로색슨-남부의 신사기질-개척지서부의 개인주의 전통 을 가장 이상적인 미국인으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또 다른 논문에서는 베버의 주장을 근거로 '캘빈주의에서 비롯되는 예정설을 신봉하고 따라서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고 내면의 종교적 가치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인간과 그를 둘러 싼 사회적 환경과의 단절이 가져오는 종교적 개인주의가 자리 잡았다'고 소개합니다.

이 글의 필자인 이현휘는 ‘미국이 소중히 하는 자유는 곧 인류에 대한 신의 선물’ 이라고 한 부시의 말을 인용하며 ‘신의 도구로 간주되는 인간이 신의 소명을 실천하는 가운데 구원이 가능할 것이라는 삶의 윤리’를 지니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제 생각도,

미국의 자유주의는, 신의 소명 실천 도구로서의 인류를 위한 자유로서 침략행위도 합리화되고  신의 세계 안에서의 관계맺기인 만큼 인간보다 신이 우선되고,(일반화할 수는 없기에 조심스럽지만 기독교인들이 특히 관계 맺는 방식이 편협하다는 개인적 경험도 좀 많았네요.^^) 인간들과의 관계에서는 개인주의적인 면이 강한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더구나 미국은 봉건사회를 거치지 않은 역사적 전통이 짧은 국가이니 예속의 경험도 없지만 공동체적 경험도 없으니까요.

'...ism'들이라 좀 정리는 잘 안되지만 아무튼‘아메리칸드림’으로 상징되는 ‘풍요’와‘자유’의 그늘에서 전쟁을 통한 군수물자를 소비해야 하는 국가, 냉혈한  자본의 총알들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끝없이 생산되는 사회, 자국국민에 대해서는 조폭처럼 결집하고 범주(?) 바깥의 타인에게는 냉혈한 사회, 나에게 미국은 그런 사회이미지로 강화되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