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자리 -김근태선생님을 추모하며
보드라운 대지의 속살을 보듬듯 흙 한삽 담아 관위에 고이 뿌렸다.
삽은 두 개, 기다리는 줄은 하염없이 길어 묵념이라도 올릴 여유는 갖지 못했다. 지선언니는 맨손으로 흙을 긁어모아 기도처럼 경건히 관을 향했다.
이렇게 진지선생님이 가시는구나,
간 밤 바람한자락 지나간 듯 홀연히 가버리셨구나..
저 땅 아래 그를 혼자두고 우리는 모두 세상속으로 들어가는구나...
살아서 고단했던 몸, 죽어서라도 편하길 바라는 남은자들의 기원이 닿았는지 묘자리는 양지바른 언덕이었다. 고무신끌고 마실다닐 만한 거리에 문익환, 이소선, 조영래.. 정다운 분들의 묘지가 두루 바라보이는 곳이었다.
필경 그의 빛나는 정신은 마석모란공원의 양지바른 언덕에서 햇살처럼 퍼지고 퍼져 우리를 따뜻하게 하리라.
김근태선생님.. 가만가만 추모의 마음을 읆조린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마치 처음부터 벗이요, 동지이며 친밀한 선배같은 분으로 늘 함께하셨던 것 같습니다. 70년대 노동운동가들에게, 특히 원풍모방노동자들에게는 어떤 지식인보다 친근하고 가깝게 끝까지 벗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원풍노조의 교육강사로도 자주오셨지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여 의장을 맡으셨을때는 비슷한 시기에 70년대 민주노조활동가들이 모여만든 한국노협이 출범하면서 정말이지 의좋은 형제처럼 지냈습니다.
‘노협’이 사무실로 사용한 신길동의 빌라는 민청련 활동가들이 내집처럼 드나들었고 한노련의 노동운동가들과 함께 밥을 먹고 회의를 하곤 했습니다. 그 방에서 열과 성을 다해 토론하고 결단하던 김근태의장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많은 재야 민주화운동가들과 함께 해왔지만 김근태선생님처럼 편한 느낌을 지니게 하는분은 드물지요. 길가다 만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없이 안부를 묻고 차라도 나눌 수 있는, 사람관계의 따스한 결을 지닌 분, 우리는 별명을 “김진지”라고 붙였지요. 그 어느것도 무심하거나 무정하게 지나치는 법이 없는 진정성이 늘 묻어나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거제도에 살던 2004년도쯤이었을까요, 무슨행사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김근태의원이 거제도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행사장 입구에서 잠시 인사를 했는데 강의도중 선생님은 “지금 이 자리에는 오랜세월 운동을 함께 해 온 장남수동지도 있다”고 해서 제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 분주한 와중에도 거제에서 활동하고있는 저의 어깨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기 위한 마음씀이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어떤 경우에도 마음을 쓰던 분, 그 마음이 얼마나 쉴 틈이 없으셨을까요.
지지난 해 원풍노조의 운동사 출판때 흔쾌히 시간을 만들어 영상인터뷰를 해주셨고 출판기념회에도 참석하여 긴시간 함께 해주셨습니다. 귀가길 택시를 잡아드리겠다하자 “괞찮아, 일 해” 라며 기어코 사양하셨지요.
뵐 때마다 조금씩 더 기울여지는 고개, 조금씩 더 창백해지는 얼굴, 조금씩 더 느려지던 발걸음.. 그렇게 힘겹게 한발 한발 버티시는 동안 세상은 무심한채 잔인하고 거칠게 요동했고 결국 이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숨결을 거두어버리는군요.
이 글을 쓰며 비로소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현실이 조금씩 실감되어 저며옵니다.
다시는 신길동 노동자들의 집에서 “김진지”선생님의 환한 미소를 뵐 수 없음에 마음이 내려 앉습니다.
사람을 능욕하고 파괴한 사람들이 뻔뻔히 잘사는 세상에서, 사람다움으로 빛나던 귀한 분을 너무도 아깝게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이 분하기만 합니다.
선생님을 말하지 않고 이땅의 민주화를 말할 수 없지만, 더불어 노동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좋은 친구이기도 했던 김근태선생님!
편히 가십시오.
몇 달전 먼저가신 이소선어머니와 먼저가신 벗들, 동지들 만나 유람도 좀 하시고 장기도 두시고 너울너울 춤도 추시고 그렇게 많이 노시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이 잘 부르셨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와 유심초의 ‘사랑이여’도 많이 부르시고요.
부디, 이제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십시오.
그 날, 원풍자녀들의 모임준비를 위해 수련원답사를 다녀오는 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김근태씨가 위독하대, 지금 자막이 나오네.”
딸의 결혼식을 불과 2주 남기고 버틸 수 없어 입원하신지 한달이 좀 넘었는가, 그간 절친한 몇분이 병실을 다녀온 후 근심이 커지는 표정을 읽긴했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다음 날 새벽 그는 결국 숨을 거두었다.
서울대병원영안실은 발디딜틈없을 지경이 되었다. 박원순시장의 얼굴도 보이고 장사익씨도 보였다. 나꼼수의 정봉주가 감옥에서 전하는 조전을 전달하는 광경도 보였다. 유명인들이 들어설때마다 수많은 카메라들이 아슬아슬 곡예를 하듯 몰려다녔다.
분향소에 흰 국화 한송이를 놓고 묵념을 한 후 국화꽃사이에서 환히 웃는 그의 사진을 보았다. 언제적 사진일까? 저렇게 환한모습을 뵌지가 언제였는지.
문상객들은 모두 착잡하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최근 몇 년동안 귀한 분들이 연이어 떠났지만 연세가 있으셨던 분들이기에 애석해도 수긍했다. 그러나 김근태를 보내는 것은 그 누구도 수용할 수 없는 지진같은 것이었다. 무너지는 가슴, 휘몰아치는 슬픔, 안타까운 회한..모두 어쩔줄을 몰랐다.
영결식날 새벽같이 명동성당에 몰려온 많은 조문객들 앞에서 함세웅신부님은 ‘반성’한다고 했다. 그렇게 아픈 사람을 채근하고 밀어붙이고 요구만 했다고, 가족들에게도 너무 미안하다고..
사람들은 모두 김근태가 앞서주기를 바랐다. 김근태가 목소리를 높여주고 김근태가 리더십을 발휘해주고 김근태가 돌파해주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김근태는 너무 ‘신사’였고 김근태는 너무 느렸고, 김근태는 ‘카리스마’가 넘치지 못했다.
사람들은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답답해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크게내면 머리가 울리고 목이 마르는 그의 증상을 아무도 몰랐다. 아무리 힘을 주려해도 점점 어눌해지는 말소리와 느려지는 발걸음과 기울여지는 고개를 그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몰랐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문의 순간에도 의식을 곧추세우고 증거를 기억해 온 세상에 ‘고문의 실상’을 알렸던 명민하고 강인한 사람이었지만 고문의 후유증은 감당할수 없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방기했다.
‘파킨슨병’
전기고문을 당한 사람들이 거의 겪게 된다는 병을 혼자 앓고 있었다.
비정한 정치의 장에서 병마의 원인같은 것은 아랑곳없었다.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서 리더의 열할을 수행해야 했기에 아픈내색을 할수도없었다.
집회장에서 피켓을 들어야했고 선거지지운동을 위해 전국을 돌아야했다.
쌍문역 2번출구 밖에서 무상급식서명운동을 하며 서 있기도 했다.
공기좋은 휴양지에서 휴식을 해도 모자랄판에 단 한순간의 휴식도 없이 온 몸의 기운을 다했다. 그리고 결국은 사랑했던 딸 병민이의 결혼식을 앞두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고 병민이는 절규했다.
“아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아빠가 평생을 수배와 징역과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는동안 남매는 협박과 가난과 불안에 시달리며 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빠를 존경하고 아빠의 선후배와 동지들을 친척처럼 따르며 잘 자라준 딸의 결혼식에도 참석못한 그 심정이 애틋하여, 아빠를 대신하여 참석한 사람들로 병민이의 결혼식장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모두 기원했다. 부디 일어나시기를..그의 부재가 가져올 허전함이 새록새록 예감되는 사람들의 열망은 간절했다.
후회는 항상 뒤늦은 자각이다.
영안실의 초상화앞에서, 비로소 ‘미안’함으로 마음이 아려오는 사람들은 길게 길게 고개를 숙였다.
명동성당앞에서 출발한 장지행버스는 열대였지만 자리가 모자랐고, 서서 가겠다고 합류한 사람들로 가득찼다.
강추위가 예고된 날이었지만 신기하게도 햇살이 따스했고 바람도 불지않아 장례절차를 순조로이 마치고 줄을 선 사람들이 관위에 흙 한 삽을 보탤때쯤 한잎 두잎 눈이 흩날렸다.
김근태를 땅아래 둔채 버스는 한 대 두 대 되돌아나갔고 나는 L형의 승용차에 합승했다.
마석을 지날때쯤 하늘이 온통 잿빛으로 바뀌면서 함박눈이 세상을 덮기 시작했다.
김근태! 시대의 상징으로 남은 그는 우리모두를 그윽히 작별하며 저 눈길따라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