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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상의 사람이 사는마을 -시민사회신문-펌

공고지 2009. 4. 8. 21:04
제91호 6면 2009년 3월 30일자
혁명의 무덤에 피어나는 노래
[이지상의 사람이 사는 마을]
이지상
40만 일제공격에 맞선 3천명 조선의용대
"잊혀진 항일열사의 죽음 너무 안타까워"


그는 뛰었습니다. 1백여명이나 되는 일본군 수색대의 추격을 뿌리치며 달리고 또 내달렸습니다.
가쁜 숨이 턱 위까지 치고 올라와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되었고, 사지는 점점 마비되어 한발자국도
더는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꼭 가야만 하는 길, 어떻게든 한순간이라도 더 살아남아 빼앗긴
조국의 원수, 민중의 원수 일제의 심장부에 비수를 꽂는 일을 반드시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수백발의 총성이 그의 귓전을 스쳤고, 그중의 몇 발은 그의 몸에 박혔습니다. 심장의 박동이
한번씩 춤 출 때마다 허벅지에 난 총상에서 피가 솟구쳤습니다. 심장을 떼어내서라도 이 피를 멈출
수 있다면 그는 조금 더 싸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군 수색병에게 은신처가 발각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최채(崔采)는 산위로. 진광화(陳光華)는 산 밑으로 그리고 그는 산 중턱으로 뛰었습
니다. 이어 울려 퍼진 총성은 그의 가슴을 오그라들게 만들었지만 그 보다 더 가슴을 찢는 소리는
사랑하는 동지 진광화의 외마디 비명이었습니다.

껑충한 키에 수척한 용모를 지녔으나 모든 동지들을 넓게 품어내는 인품으로 화북지대 대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혁명가 진광화(1911~1942)를 잃는다는 것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의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다행히 적들은 더 이상 추격해오지 않았고 그는 총상을 입은 다리
를 끌어 관목 숲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침착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짐하며 독립투쟁의 험난한
과정을 지탱해 주었던 페퇴피의 시를 몇 마디 읊조리는 순간 정신을 잃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윤세주의 삶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도 바치리.’(헝가리 민족시인 페퇴피 시 중에서)


석정 윤세주(1901~1942). 3.1운동의 선두에 선 열혈청년이며 의열단의 2인자. 지방청년운동과
신간회지회의 주요간부에서 다시 중국으로 망명. 단체통일운동과 조선혁명 간부학교교관, 민족
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창건. 그리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정치 지도원으로 활동했던 그의 삶은
그렇게 마감 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중국의 태항산 지류인 화옥산 근처농가의 밭고랑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탈출을 감행했던 진광화 역시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쫒기다 그의 고향 평양으로 향해 있는
산등성이의 수십 길 절벽 위에서 조국으로 향하는 바람을 타고 뛰어 내렸습니다. 1942년 6월의
일입니다.

40여만이 넘는 엄청난 병력과 전차와 전투기까지 동원한 일제의 공격에 결연히 맞서 싸웠던 3천명
의 조선의용대원 대부분도 그와 같은 길을 갔습니다. 그 길엔 이미 한 해전 호가장(湖家莊) 전투
에서 다리를 잃은 <격정시대>의 작가 김학철이 있었고, 후에 <노마만리>의 작가 김사량과
<연안 행>의 김태준 그리고 <중국 인민 해방군가>의 작곡가 정률성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항산과 조선 의용대는 식민지 피 끓는 조선청년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불요불굴,
견정불발(堅定不拔)의 투지를 담은 조선의 노래가 남아 있습니다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김학철 시, 류신 작곡 조선 의용군 추도가)


이념의 하늘서 방황하는 영혼

할 수만 있다면 윗옷을 벗어젖히고 살갗이라도 벗겨 시원한 바람 한줄기 맞고 싶을 만큼 더운 날씨
였습니다. 윤세주, 진광화 두 분의 무덤이 있는 석문촌(石門村)의 태양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기억
해주지 않았던 두 열사의 흔적을 찾는 우리를 괘씸하다는 듯 폭염으로 맞이했습니다. 마을에서
 버스를 내려 두 분 열사의 묘까지 가는 언덕 양 옆으로는 넓게 펼쳐진 과수원이 있었습니다.

내 키 정도밖에 안 되는 나무에는 파랗거나 붉그스레한 열매들이 달려있고, 처음 보는 나무의 정체
가 궁금했던 나는 발갛게 익은 열매 한 움큼을 훑어 한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산초나무였습니다.
맵기로 유명하다는 중국 사천요리의 기본 향료가 한 입 들어갔으니 혓바닥이 얼얼하고 볼 따귀가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38도를 넘나드는 폭염과 발바닥에서 정수리로 치 올라오는 지열. 산초열매의 열기까지 등 짐지듯
안고 야트막한 산을 오르기를 약 20여분. 병풍처럼 둘러진 절벽을 뒤로한 언덕위에 두 분이 누워
계셨습니다. 우리 일행보다 먼저 올라와 무덤을 손질하던 섭현 석문촌의 연세 지긋한 노인은 일본
군이 열사의 무덤을 훼손할 것을 염려하여 처음 묻혔던 화옥산으로부터 수 십리 떨어진 이곳까지
옮겼다고 했습니다.

1942년 몰살당할 뻔 했던 중국 팔로군 사령부가 기사회생한 것은 조선의용대가 아니면 불가능했었다고, 윤세주, 진광화와 더불어 조선의용대는 중국 공산당의 은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덤 관리도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두 그 마을 주민들이 하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 말을 전하는 노인의 목소리를 많이 떨렸고 때로는 눈물기가 묻어 나왔습니다.

제(祭)를 지내고 무덤에 술잔을 부었습니다. 몇몇은 사진을 찍었지만 또 몇몇은 무덤을 등지고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일제와 싸우다 산 그림자도, 그늘을 만들어줄 나무도 하나 없는 쓸쓸한 언덕에 누웠으나 편히 쉬지
못하고 갈라진 조선의 하늘의 정 가운데에서 방황하는 두 분의 영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주벌에서 풍찬노숙 하던 조선청년 이우석/서로군정서에서 북로군정서까지 병서를 다 옮기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사들인 신식 총, 백두산 화룡헌 청산리에 가져왔지/삼일밤낮을 싸워 청사를
빛냈건만 마침내 부대원들 뿔뿔이 흩어져…
의혈남아 기개와 순정뿐인 그 사내/포상심사에서 빠지더니 18년 만에 5만1천원씩 연금 받았지/
난곡 철거민촌 단칸 셋방에서 부인은 파출부로, 여든일곱 그 사내/막노동판에서 노익장 자랑
한다지.’(민병일 시, 이지상 곡 ‘살아남은 자의 슬픔’)


내장을 휘도는 그 열기

산초열매의 화끈거림이 입안에 가득한데 제주(祭酒)로 바친 고량주를 세 잔이나 거푸 들이켰습니다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열사의 죽음과 조국으로부터 헌신짝처럼 내쳐진 그들의 무덤은 대륙의 태양
열과 함께 분노로 끓어올랐지만 시대의 횃불로 살아 진정한 자주 독립을 꿈꾸었던 그들의 혁명
기치는 쓰디쓴 고량주 석 잔과 석정이 지은 조선 의용대의 노래 ‘최후의 결전’과 더불어 지금도
나의 내장을 휘돌고 있습니다.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가자. 생사적 운명의 판가리다/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어 원수를 소탕하러
 나가자/총칼을 메고 결전의 길로 다 앞으로 동무들아/독립의 깃발은 우리 앞에 날린다. 다 앞으로
 동무들아.’(윤세주 작시, 바르샤바 혁명행진곡 ‘최후의 결전’)

이지상 가수,성공회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