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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비
공고지
2009. 12. 22. 13:36
초가을 비
도종환
마음 무거워 무거운 마음 버리려고 산사까지 걸어 갔었는데요.
이끼 낀 탑 아래 물 봉숭아 몇 포기 피어 있는 걸 보았어요.
여름내 비바람에 시달려 허리는 휘어지고
아름다운 제 꽃잎이 비 젖어 무거워 흙바닥에 닿을 듯 힘겨운
모습이었어요.
비안개 올리는 뒷산 숲처럼 촉촉한 비구니 스님 한분
신발 끄는 소리도 없이 절을 돌아가시는데
가지고 온 번뇌는 버릴 곳이 없었어요.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만 사랑하고 살아가며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제가 지고 선 세속의 제 무게가 있는 가 봐요
내리는 비 한 천년쯤 그냥 맞아주며
힘에 겨운 제 무게 때문에 도리어 쓰러지지 않는
석탑도 있는 걸 생각하며
가지고 왔던 것 그대로 품어 안고 돌아 왔어요.
절 지붕 위에 초가을 비 소리 없이 내리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