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

피어싱

공고지 2009. 3. 14. 10:16
 

가외시마 마사유키- [피어싱]감상


      학대의 사회적 반응

    -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치아키의 은색바늘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자기를 닮은 아들의 모습에서 암울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의 대물림을 두려워한다. 아이를 목욕시키고 있는 아내의 사랑스러운 모습에서 그는 아이를 아이스픽으로 찌를 것만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어린 날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증오의 대리자가 된 마사유키는 동생과의 이해할 수 없는 차별까지 겪고 극도의 정신적 공황을 겪으며 어느 날 초라하게 용서를 비는 어머니를 ‘마구 두들겨 패기’도 하며 자란다.

그러나 제과점에서 빵 굽는 여인 요코를 만나 ‘사람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으며’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두 사람  사이에 아기도 태어나 정상적인 평화로움을 맛본다. 그러나  아내가 갓 난 어린 아기를 목욕시키고 있는 행복한 장면의 순간,  잠재되었던 유년의 심리적 고통이 파탄을 일으킨다. 가와시마 마사유키는 자신을 닮아갈 아이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지 못한 체 불특정의 타인에 대한 살인계획을 꿈꾼다.


아동보호시설에 함께 수용되어 있던 다쿠는 검정색이나 회색으로 덧칠한 도화지 한가운데에 발가벗은 아이가 홀로 서있는 그림을 그리며 그것을 자신이라고 말하고 자신이 아니면 누구여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극도의 자기연민이며 또 아무도 없는 홀로의 자기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쿠는 수용소의 토끼를 누구보다 귀여워하며 보살피다가 순간적으로 토끼의 귀를 잡고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린 후 미처 죽지 않은 토끼를 껴안고 쓰다듬던 그 표정으로 짓밟아 죽인다.


 가와시마 마사유키의 범행대상으로 선택(?)된 차아키는 마사유키와 같은 학대의 피해자이다. 그녀는 어린 날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죽어버리고 싶어 할 때 “그 인간도 (아버지)죽으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  모멸과 분노의 기억을 지닌 여성이다. 그러나 아무런 치유의 과정 없이 술과 마약으로 자학하며 직업여성으로 산다. 그녀가 아는 세상의 모든 남성은 치아키를 욕망해소의 수단으로 볼 뿐이다.


세상은 많은 종류의 학대와 폭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폭력 후 상황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폭력의 결과는 자칫하면 또 다른 대상에 대한 폭력으로 되갚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개인적으로 폭력, 또는 학대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어릴 때 기성회비를 가져가야 하는데 ‘장날 지나 주겠다.’는 할머니께 버티고 서  있다가 애살맞은 할머니가 속이타서 매를 들고 학교로 쫓은 적 이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은 한스럽거나 아픈 기억이 아니라 가난한 농촌에서 학교에 보내야 하는 할머니를 애타게 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어련한 그리움으로 남는 대목이다.  폭력이 아니라 그야말로 ‘사랑의 매’ 일 것이다.

그러나 1980년 5.17 이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감금된 적이 있다.

까만 세단에 강제로 팔을 끼워 끌려간 합수사안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아무것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었던 시절의 그 ‘폭력’은 이후의 삶 굽이굽이마다에서 분노와 증오를 각인시켰다.

그 이후 군복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길가다 군복을 보면 공연히 섬뜩하고 피하게 되는 세월이 있었고 때때로 꿈속에서도 가위눌리는 오랜 흔적으로 남았다.

그 후 국민의 정부시절 청문회에서 모국회의원이 5공화국정권의 대통령이었던 자에게 ‘이 살인마!’ 라고 외치며 명패를 집어던지는 사건이 있었고 그때 그 학살자의  뻔뻔하면서 비굴한 얼굴을 보며 통쾌함보다는 서럽고 억울하고 통곡하고 싶은 심정을 느꼈다.

 정권이 바뀌고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기 들어서고 그때의 저항세력들이 집권세력이 되어 ‘과거사 청산’ 이나 ‘민주화운동 보상’을 예기하지만, 각인된 상처가 늘 아픈 것은 폭력의 당사자가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목 메이게 절규하는 가장 큰 한도 폭력의 행위자가 사과하지 않는 것, 자기들의 행위가 정당한 듯 그래서 피해자가 ‘내 잘못인 듯’ 웅크리고 죄 지은 듯 짓눌려 있어야 하는 바로 그 이유인 것이다.


이 소설은 상쾌하지는 않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더욱 가정이나 사회에서의 만연된 폭력의 양상들을 생각하며  심기가 불편해진다.

폭력의 경험을 사회와 개인이 함께 잘 극복하여 치유하지 못하면 이유 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각종의 양태로 반응할 수 있고 그것은 또 하나의 불안한 씨앗을 잉태시킨다. 가정폭력, 학교폭력, 전쟁이나 경제적 폭력, 모든 것이 새삼 두려워지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마사유키, 다쿠, 치아키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까?


그러나 한편 이 소설은 읽는 재미가 있다.

어릴 때 읽을 책이 많지 않은데 빨리 읽어 버리는 것이 아깝던 때처럼 다 읽어가는 장이 아쉬웠다. 무라카미의 소설에 관심이 간다.

기회가 되면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다.

혹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사나다 치아키의 유두를  뚫어나가는 은색 바늘로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2007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