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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7 "여한이 없제? ...그라믄 됐다"
“여한이 없제?…그라믄 됐다”
[사랑의 풍경] 박경리 ‘토지’
한겨레
» 최재봉 기자
박경리(1926~2008)의 대하소설 <토지>에서 하동 평사리의 농토를 둘러싼 각축전의 주인공은 최참판 댁 상속녀 최서희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랑의 드라마를 엮어 가는 것은 용이와 월선이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토지>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니는 내 목구멍에 걸린 까시다. 우찌 그리 못 살았노. 못 살고 와 돌아왔노.”

용이와 무당의 딸 월선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혼인으로 맺어지지는 못한다. 월선의 천한 신분을 문제 삼은 용이 어머니의 반대 때문이었다. 결국 용이는 어머니가 정해 준 혼처 강청댁과 결혼하지만,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에 마음을 붙이지 못한다. 월선이는 월선이대로 나이 먹은 봇짐장수에게 시집갔으나 살지 못하고 돌아와 하동 읍내에 주막을 연다. 위에 인용한 대사는 설날 읍내에서 열린 오광대놀음을 구경하러 갔다가 월선의 주막을 찾아 처음으로 몸을 섞으면서 용이가 월선에게 하는 말이다. 용이의 말은 이어진다.

“어느 시 어느 때 니 생각 안 한 날이 없었다. 모두 다 내 죄다. 와 니는 원망이 없노!”

‘왜 너는 나를 원망하지 않느냐’는 것은 용이의 주제곡과도 같다. 월선을 향한 용이의 사랑은 미안해하는 사랑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용이는
강청댁과 헤어지고 월선과 결합할 마음을 먹지 못한다.

“천분만분 더 생각해봤제. 다 버리고 다아 버리뿌리고 니하구만 살 수 있는 곳으로 도망가자고.
안 될 일이지, 안 될 일이라. 이 산천을 버리고 나는 못 간다. 내 눈이 멀고 내 사지가 찢기도
자식된 도리, 사람으 도리는 우짤 수 없네.”

자식 된 도리와 사람의 도리, 그리고 그 도리 바깥에서 월선을 향해 타오르는 사랑 사이에서
용이의 생애는 찢겨진다. 용이와 월선이 사이에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강청댁이 평사리를
휩쓴 호열자에 희생되고 난 뒤 용이는 법적으로 홀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운명은 또
한 번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을 장치를 마련해 둔다. 지아비 칠성이가 서희 아비 최치수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당한 뒤 동네에서 사람대접 받지 못하던 임이네를 연민과 동정의 마음으로
돌봐 주던 용이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임이네에게 임신을 시킨 것이다. 이 상황에서 월선이를 만난
용이는 다시 예의 ‘원망’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노래한다.

“우찌 니는 그리 원망이 없노. 나를 야속다 생각했겄지.”


이런 용이와 운명의 사랑을 나누는 월선이인즉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전통적 여성상의 전형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용이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근거로 무슨 권리를 주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용이의 사랑일 뿐이다. 다른 모든 조건이나 보상 따위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사랑은 그의 이념이자 존재 이유이다.

최서희 일행과 함께 평사리를 떠나 만주 용정에서 ‘길고 긴 세월, 질기고도 한 많았던 인연’을
이어 가던 두 사람이 암에 걸린 월선의 임종 장면에서 나누는 대화는 이들의 사랑이 결핍과
불구성 속에서도 나름대로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한으로서의 삶과 사랑에 최선을 다했고, 이제 남은 한이 없다는 두 사람의 생의 결산은 일종의
비극적 숭고미에 다가간다. 용이와 월선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러나 포기할 수도 없는
사랑이다.

최재봉 기자

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