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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03 아이스크림과 늑대
 이현승의 '아이스크림과 늑대'감상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허상을 마주함


 시집을 펼치면서 냉동실에 넣어둔 아이스크림이 떠올랐다. 나는 하얀 속살에 곱게 쵸콜렛이 씌워져있는 <누가 바>를 좋아한다. 그러나 유감, 시집 감상의 질적 도약을 위해 냉장고를 열었지만 웬걸, 아이스크림은 사라지고 없었다. 딸이 한발 빨랐던 것이다. 입맛을 다시며 역시‘아이스크림은 사라져버리는 것’에 심중을 굳히고 전투자세를 취한다. 선생님은 난해하지 않고 잘 읽힐 수 있는 시집이라고 하셨지만 그간 시인들과의 전투를 생각하면 일단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

이현승의 시집은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울면서 녹아내리는 아이가 첫 장에 등장했다.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상식(?)적인 시의 틀이 주는 편안함에 다가서기 편했다.

[식탁의 영혼]을 보면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은 나름대로 모기업의 그럴듯한 직책을 맡고 있는 남동생이 어릴 때였다. 그 친구가 어느 날 가족들이 모인 식탁에서 수저를 놓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까닭인즉슨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우습다’는 것이다. ‘모두 말도 하지 않고(가부장적인 종가이니 오죽하겠는가) 뭘 그리 먹고살겠다고 열심히 입으로 음식을 가져다 나르는 게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한다.’는 것, 우리는 매일 하루 두 끼 또는 세끼를 식탁에 앉아 우적우적 음식을 먹는다. 먹자고 사는지, 사느라고 먹는지, ‘콧수염에 묻은 우유를 닦아내면서 짐짓 경건하게 예절에 대해 말’ 하면서 무엇을 완성해가고 있는 것인지.


[해변의 여인] 낭만적인 제목의 이 시에서 나는 습관처럼 군부독재를 읽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떠올랐고 전기고문으로 발뒤꿈치에 딱지가 앉았던 김근태가 떠올랐다. ‘목구멍에 소금을 한줌 처넣은 듯’ 목마르던 시절의 기억들이 선명한데 ‘피의 역사는 반복된다.’고 섹스피어가 말했던가, 엊그제 총선에서는 보수의 깃발을 든 ‘뉴 라이트’ 주자와의  대결에서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김근태가 참패했다. 오래전 인기영화배우 아들이라는 한나라당 정치초년생에게 삼성재벌의 비리를 집요하게 제기해왔던 ‘진보의 상징’ 노회찬도 고배를 마셨다. 진화된 ‘피의 역사가 반복’될 것도 같은 혼란스러운 이 시대, 오늘의 시인들은 무슨 시를 쓸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시는 ‘가질 수 없는’ 연인에 목말라하는 갈증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애완시대]도 재미있는 시였다. ‘단 5초 만에 모든 게 끝날 수 있는’ 빨리 빨리 로 상징되는 속도의 시대, 얄팍함에 대해 말하는 듯, 아이스크림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들. 달콤하지만 결코 지속되지 않는 무망함이 느껴진다.

[걱정이 걱정이다]는 시와 똑같은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들은 너나없이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정말이지 그 걱정이 걱정스러워서 우리는 이것저것 숨기게 되고 그러면 여지없이 전화벨이 울리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다 별일 없느냐’는 걱정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어느새 나도 어머니를 조금씩 닮아가고 나의 딸로 하여금 ‘걱정이 걱정’ 되게 하는 측면도 발생하고 있다.


[모래알은 반짝]도 인상적으로 남는다.

‘조립은 분해의 역순이고, 연인들은 헤어지면서 사랑을 이해하고, 손깍지를 풀면서 기도는 완성되고, 깨진 유리병에 감추어져 있던 금’은 세상의 상식(?)에 대해 비상식일 때 더 상식적일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제기하는 듯하다. 구성되어 있는 것들을 부숴뜨리고 햇살아래 부숴 진 ‘모래알처럼 반짝’이고 싶어지게도 하는...


 시집이 끝나는 장에서 시인은 [모든 것에 대해 긍정하는 마음을 당신은 설탕에게서 배울 것인가?] 라고 질문한다. 이건 또 무슨 조소인가? 반어법인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얄팍하고 부드러운 설탕에게서 긍정을 배울 것이냐고? 모든 것은 사라지는 것이기에 또는 사라지지만 ‘조립은 분해의 역순’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집착도 욕심도 가질 필요 없는, 녹아내리는 설탕처럼 아이스크림처럼 긍정하라고? ‘막대사탕을 들고 낙관하는 자의 썩은 이빨’ ‘중심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위에 단맛을 뿌려주면서’ 살다 간 자의 이율배반적 묘비명처럼.

시인은 부수어진 것, 사라지는 것, 깍지를 푼 손, 탈영병 등, 규격화 된 구조를 해체하려하고 속박되는 것들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 아닐까? 이 시를 읽으면서 오래 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던 김준태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라진다는 것, 부숴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2008년,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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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