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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9 할머니!!!

할머니!!!

단상 2009. 4. 29. 08:54
 

어제, 96세로 壽를 다하신 선배 시어머님 사진을 본 탓일까, 93세까지도 총기있게 살다 가신 나의 할머니를 회상한다.
언젠가 할머니와 함게했던 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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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8월 7일  일기.

태풍으로 철수한 후 나머지 휴가를 어찌 보낼까 생각다가 밀양에 와 있는 진이네도 볼겸 할머니와 엄마도  모셔오기로 했다. 바로 가서 모셔오면 한 이틀 남은 휴가 동안 바다구경도 하시고 토요일 오전 근무  후 모셔다 드리면 되겠다는 계산에서다.

그러나 '돈도 되지 않고 사람 고생만 힘겨운 염소' 탓에 결국 엄마는 못 오시고 할머니와 진이네만 함께 왔다.

저녁을 먹은 후 출발했는데 장승포까지 오는 3시간 반 가량이 여든일곱의 노인께는 퍽 고생스러우셨나보다. 멀미약에 우황청심환에 중간 중간 몇 차례 쉬기도 하셨지만 연세가 연세이니만큼... 옛날엔 멀미 같은 건 접근도 안하셨던 분인데..

이래서야 어디 나가시기나 하겠는가, 걱정스러웠는데 하루 밤 푹 주무시더니 원기를 회복하신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너그 작은아버지 땅 사놨다는 데는 어디고?” 였다. 두말도 안 하시고 거제도엘 오시겠다고 따라나서시던 심중엔 바로 그 관심도 자리하고 있었던 거구나 라는 생각에 노인네의 끝없는 편애와 꿍심이 얄밉기까지 하면서도 저것이 부모마음이다 싶은 한탄이 차오른다. 상대적으로 삼촌이 새삼 미운 심정.. 동네 앞을 지나 운문사 구경을 가면서도 할머니 한번 모시고 갈 줄 모르는 그 대단한 아들...

아무튼 바다 구경에 나선 할머니는 생기가 넘친다.

차창너머로 끝없이 푸른 바다가 들어오는 순간 “나무관세음 보살..”을 끝없이 뇌시는 할머니만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김영삼대통령 생가를 지나 고운몽돌이 깔린 마을앞 바다에 닿았을때는 차에서 내리시는 순간 두 손을 모아 바다를 향해 합장을 하시는 것이었다.

 땀띠투성이인 몸을 바닷물에 푹 담그고 즐거워도 하시고.. 마침 그 마을엔 두레박으로 길을 수 있는 맑은 우물이 있었는데 이 지점에서 할머니의 경외감은 극에 달했다.

“물좋다.”를 되풀이 되풀이 하시며 귀한 보배를 만지듯 하신다.

돌아오는 길에 대통령 생가를 들렸을때는 클린턴과 조깅하는 대통령 사진을 보고도 절을 하신다. 이날 밤 피로에 지쳐 떨어진 우리 모두는 한밤중 할머니의 고함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이 놈들아, 너그 어느 집 손(자손)이고?” 라며 고함치시는 할머니의 잠꼬대다.

“왜 그러세요 할머니?” 흔들어 깨웠더니 ‘아이들이 우물에서 장난을 하며 물을 더럽혀 야단치시는 중 이었다’며 겸연쩍어 하신다.

낮에 본 우물이 그리도 경이로우셨던가, 평생을 우물에서 물 길어 생활하셨던 할머니는 물을 보배처럼 귀히 여기시고 절대로 허투로 쓰지 않으신다. 더구나 요즘 두레박으로 퍼 올리는 맑은 샘물을 보기가 어디 쉬운가? 골동품처럼 보관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한 바가지 가져다 드릴 것을..


다음날도 우리는 바다가 잘 보이는 해변으로 할머니를 모시기로 했고 할머니는 보무도 당당히 차에 오르셨다. 학동의 몽돌 바다에서는 몽돌을 만져보고 또 만져보고 하시며 결국 몇 개를 조마니에 넣으신다. 그리고 해금강 호텔 옆 그늘에서 가져간 김밥을 펼치고 냄비를 가져가서 전복죽을 사와서 점심을 먹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해금강 바다를 보며 보냈다. 할머니의 입에서는 “아미타불..” 이 거듭되고..


토요일, 00아빠는 오전 근무만 하고 돌아왔고 우리는 다시 밀양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약국부터 들러 우황청심환과 멀미약을 드셨지만 아무래도 노인이시라 3시간 이상의 드라이브는 힘겨워하셨다.

그럼에도 집에 도착하여 “동네 노인들이 나무그늘에 모여 놀고 계신다”는 엄마 말씀을 듣는 순간 앉지도 않으시고 사탕봉지와 소주병을 챙겨 나가시는 모습 보며 우리는 눈짓으로 웃을 수밖에.

 얼마만의 외출이셨을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가는 성냥 곽 같은 아파트와 좌변기니 뭐니 처음 보는 것들도 시골 노인들께는 자랑(?)이 되실까?

아무튼  할머니의 생기와 자연에 대한 무한한 경배의 모습은 결코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또한 겨우 며칠의 체험으로, 아버지도 돌아가신 가난한 종가살림 꾸리며 수 십년을 지성껏 모시고 평생을 같이 하는 엄마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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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