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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05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감상 -주인공인
동생 데미언이 형 테디 오도노반에게 보내는 편지로.


                       아직 늦지 않아!

                              


“아직 안 늦었어.”

형은 말했지. 내가 되물었어.

“내가? 아님 형이?”

돌이켜야 할 어떤 순간이라면 과연 내가? 아님 형일까?

나는 이미 시네트에게 고별편지를 썼어.

‘사랑하는 시네트 ..(아. 이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형이 알까?) 아일랜드에서 뛰어노는 저 아이들의 자유가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다.’고 그리고 덧붙였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젠 알듯 하다고’

형, 나는 이제 알 것 같아. 우리가 함께했던 투쟁이 무엇을 이루려고 한 것인지, 그리고 형이 지금 무엇을 돌이켜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조국의 언어로 이름을 말하기를 고집했던 열일곱 살 미하일의 열망이,

총 개머리판으로 짓이겨지면서도 영국 군인을 탑승시키지 않으려던 기관사의 고집이,

힘없는 식민지의 국민이었기에 배신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크리스가 처단의 총구 앞에서 자신의 ‘주검을 그들과 함께 묻지는 말아 달라’던 안타까운 회한들이,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을 지키고 싶어 했는지를..

우리가 이루려고 한 것이 영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조국’의 해방 만이었을까?

조국이 지녀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행정부를 입법부를 사법부를 구성하여 각개의 민족국가를 명확히 하는 것? 주권을 찾는 것? 그것은 귀중한 목적이기도 하지만 내용적 목적은 아니지 않을까?


형, 나는 애초에 이념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지. 의사라는 직업으로 적당히 살아갈 수 있었고 그렇게 살면 되는 사람이었어.

그러나 내가 목격해 버린 것은 식민화되었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아일랜드인 들의 처참한 조건이었고 그것이 나를 전선에 뛰어들게 한 것이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이었어.

그런데 식민정부를 이어 받아 혁명군의 복장에서 영국군이 입었던 군복으로 바꿔 입은 형들의 모습은 우리가 갈망했던 자유의 모습은 아니었어.

서민을 수탈하여 원금의 50%이자를 받아 챙기는 고리대금업자를 자금줄이라는 이유로 옹호한다면 그 무기를 사용하여 얻을 것은 무엇이지? 그렇게 실용이라는 이름의 상황논리와 타협하면서 형들도 식민제국의 논리를 닮아가는 것 아닐까?

아일랜드를 대영제국의 자치령으로 하면서 영국국왕이 존재하는 이상한 조약에 동의하는 교회는 또 무엇을 얻으려는 걸까? 그때 성당을 박차고 나오는 나에게 형은 ‘이상주의자’라고 했던가? 그 조약을 통해 바뀌는 게 뭐지? 국기색깔, 정치지도자? 형이야말로 이상주의자 아닐까, 나는 현실이 보이는데..


 지도자는 중요한 순간 항상 선택을 해야 하지. 오랜 전쟁으로 고단한 사람들의 삶은 지치기도 하고. 그래서 전쟁을 지속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들이 오기도 해. 그러나 지금 영국의 절충적 타협방식에 동의하는 것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올까? 우리의 고통은 총체적이었고 정신의 문제와 물질의 문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정신적인 자유의 갈증이 더 컸기에 떨쳐 일어 난 것이었지. 더구나 나는 충분히 ‘살찐 돼지’로 살 수 있었고 제국에게 빼앗기지 않는 주권을 회복한다면 물질적 풍요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좀 더 길고 오랜 고통이 따르겠지만.

전선을 떠난 정치의 현장에서는 이상적 이론과 괴리되는 현실도 있을 거야. 형은 독립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의 현실적 절충을 택한 것이고 힘을 키워 완전한 독립으로 가겠다는 것 일 테지. 형도 많이 고뇌 했을 거야. 내 심장에 총을 쏘아야 하는 형의 눈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어. 어찌 쉽게 결정한 일이겠어? 우리가 가진 힘은 약한데 일렬종대로 전선에 서서 장렬히 전사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미래를 위해 수많은 아일랜드인의 목숨을 살려야 하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래서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택한 심정이었겠지. 그런데 나는 왜 형의 강변이 우리가 가진 독립운동의 열정보다 허약하게 느껴질까?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생각하지 않는 이론적 이상주의는 이론만으로 전위적일 수도 있지. 그러나 형, 우리의 투쟁은 삶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민중들은 약게 계산하지 않고 싸워야 할 자리에서 목숨을 걸지. 미하일이 그랬고 우리의 벗들이 그랬어. 나도 그럴 거야.


전선에서는 적과 동지가 명확하고 치열하게 머리 맞대어 미래를 꿈꾸고 기획하지. 그 치열함으로 제국의 대오에 균열을 만들어왔고 피로를 느낀 그들은 일정하게 유화정책을 구사하게 되고. 통치의 피로를 줄이기 위해 기만적 술책을 제시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거야. 모든 제국은 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내부의 균열은 이때 발생하는 것 같아. 해석의 기준이 달라지는 거지. 적의 의도를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입신양명의 달콤한 유혹에 흔들리는 거야.

순수와 열정도 ‘유화적으로’변화하고. 어제의 적이었던 그들의 군복을 입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식의 그럴듯한 합리화가 등장하기도 해. 그런데 참 씁쓸한 것은 가장 전위적이었고 가장 이념적이었던 형 같은 지도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타협하더라는 거야. ‘이념’으로 시작한 형과 ‘인간’으로 시작한 내가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서게 된 것이지. 그래서 허탈하고 적막해지기도 해. ‘시대인식에 뒤떨어진 이상주의’, 또는 ‘처세에 밝지 못한 무능력자’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더구나 가슴이 아픈 것은 적에게 겨누었던 총구가 내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어제의 동지가 오늘 적이 되어 있는 이 기막힌 사실 말이야. 동고동락했던 우리들 내부에서 이렇게 자기기만적 배타가 표출되다니. 영국은 통제하기가 매우 수월해지겠군.

우리의 선량한 국민들은 적의 총구 앞에서 독립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지. 그리고 국민의 삶을 움직이는 결정권자의 자리를 고스란히 지도(?)그룹에게 위임했고 박수치며 응원하다 뒤통수를 맞고 있다는 사실..


형은 내가 이렇게 죽는 것이 무모하고 헛되다 할 수 있겠지. 그래서 눈물을 흘리더군. 나도 미하일이 죽을 때 그렇게 생각했어, 그깟 이름 그냥 영어로 말해주면 안 죽을 텐데..그런데 형, 그 미하일 들이 나를 혁명투사로 만들었거든. 그래서 이만큼 왔는데 여기서 머무르려고 하는 형은 비겁해. 그리고 형의 논리는 형의 행동들로 인해 더욱 동의할 수가 없어. 점진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기 위한 ‘전술’로 볼 수 없는 권력자들의 모습이거든. 형의 입장이 현실적 대안이라면 그 대안이 아일랜드의 민중들에 대한 애정과 고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행동에서 보여져야 했어. 민주주의는 지난(至難)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라도 우리가 그토록 찾으려했던 가치이고 앞으로도 가꾸어 가야할 가치이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마치 병사들이 죽어간 전선의 핏자국이 마르기도 전에 훈장을 치켜드는 장군처럼 형이 걸친 군복은 거북하더군. 그리고 어쩌면 ‘명분’안의 진실은 따로 있는지도 모를 일이야. 암묵적인 합의 같은 것..

 형은 완장을 두른 순간 소영웅주의에 빠져버린 건 아닐까?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대의를 위해 작은 것은 버려야한다는 식으로, 제국의 기만적 술책을 ‘절충’이라는 명분하에 ‘눈물을 머금고’ 타협하는 소영웅주의자. 그런 형에게서, 태동하는 파시즘의 무서운 독버섯이 보여.


형!

전쟁의 상흔을 지니고도 푸르게 피어나는 아일랜드의 보리밭 사이에 일렁이는 저 바람결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봐.

과연 무엇이 옳은 걸까?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남은 곳엔  또 무엇이 있을까?

사람은 정말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보리밭에 바람결은 저리 고운데..

바람결처럼 잔잔하게 또 간곡하게 나는 지금 형에게 말하고 싶어.

형! 아직 늦지 않았어.


 

* 이 영화를 본 날, 오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이 땅위에서도 무수히 겨누어지고 있는 형들의 총구(고뇌?), 그 총구 앞에 결연하게,
또는 무력하게 서 있는 무수한 동생들에 대한 깊은 상념에 아일랜드의 푸른 보리밭을
헤매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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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