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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03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신동옥의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감상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해주는 예사롭지 않은 도발과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주는 거부감에 불편하게 접한 시집이다. 더구나 책 주문과정의 착오로 허리에 탈이나 치료중인 상태로 교보문고까지 가서 허겁지겁 구해 와야 했으니 나와는 정서적 궁합이 맞지 않는 시인일 거라는 '머피법칙'식의 예감까지 드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집을 읽으며 내내 곤혹스러웠다. 나는 여전히 ‘무릇, 글이란 (공개적으로 내놓을 바에는) 사람과의 관계를 열겠다는 뜻이고 다수의 대중이 읽었을 때 공감이나 감동 같은 것이 와 줘야 하는 것’ 이란 생각이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뭘 하자는 건지, 어렵고 피곤했다. 읽다가 답답해서 두 번이나 해설을 읽어보며 그나마 약간의 여유가 생기긴 했다. 위로가 되는 것은 해설을 쓴 김 언 도 ‘난해함’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덧붙여 ‘협소한 지점에서 독자를 발견해야 하는 그의 선택’에 아마도 시인(신 동옥)은 “신경 안 쓴다.” 라고 답할 것이라 했다. 신동옥의 이런 반응이 나는 공감하기 어렵다. 나도 오래전 출판이라는 걸 해 본적 있지만, 독자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는 작가라? 그렇다면 왜 출판 하는 거지? 그냥 혼자 쓰는 것으로 자족 하던가 동인들끼리 돌려 읽으면 될 것이지 왜 세상에 내놓아 우리를 힘겹게 하냐고요!

아무튼 계속 투덜거리며 ‘분석적’으로 보려고 애를 썼지만 평론은 이미 읽었고 그 외의 것은 나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다행히 반짝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있었으니 [비 오는 날]이다.

손창섭의 [비 오는 날]을 재미있게 읽었고 그 작품에서 전쟁의 상흔처럼 다리를 저는 동옥의 처연한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기에, 작가의 이름과 같은 소설 속 여성 주인공을 시적 대상으로 되살려 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동옥이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한푼 두푼 모은 돈을 사기 당한 후 어딘가로 떠나버렸고 뒤늦게 동옥의 집을 찾은 화자 원구가 망연자실하던 장면이 선하게 남아있다. 그 장면에서 평소 동옥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던 원구는 어쩌면 홀가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던...

소설에서 “이 전쟁 통에 얼굴 반반한 계집이 갈 데가 어디 있겠느냐”던 등장인물의 말을 이어 시인 신 동옥은 소설 속 동옥을 만나러 청량리로 간다. 53년 전쟁의 상흔이 자리한, 어둡게 비 오던 거리에서 비처럼 축축하던 동옥 남매의 삶은 여전히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고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절규하기도 한다.


지난주 오 규원의 시집에서도 그랬지만 시인들의 상상력은 정말이지 상식(?)을 뛰어넘는 그 어느 지점에 가 닿는 것 같다. 우리가 그냥 지나치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들에 시선을 꽂고  무한한 상상력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김춘수 시인이 ‘내가 네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을 때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을 뿐’ 이던 길가의 한 송이 꽃에게 이름 불러 의미를 부여했던 ‘불러주기’를 조금씩 이해할 듯도 하다. 이것이 또한 이 수업에서 조금씩 쌓아가는 하나의 성찰적 자세이고 의도하는 어떤 지점이 있을 것도 같은...

자세를 가다듬고 다시 꼼꼼히 읽어보니 고집불통이고 오만한 방랑자일 것 같은 신동옥의  시들이 술 취한 듯 건들건들 다가온다. 그렇지 이 시는 2만3천원어치 소주에 고갈비와 빈대떡 안주까지 먹은 기분 좋은 취중에 나올만한 시이겠다. [계산서] 이다.


TV에는  잘린 손가락

술잔에는 태극기

광복절

곰팡이들이 거리로 뛰쳐 나오고

쥐떼가 하늘로 날아가고

폭정이 끝났다

그런데 시인은 조그만 일로 ‘쌈박 질’을 한다.

광복절이고 ‘폭정도 끝났다’는데, 우울한 그는 ‘희망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자꾸 술을
 퍼마신다.


술 취한 달

고통의 꽃으로 피어오르고

나 홀로

삶의 까만 술병 주둥이를 향해 자맥질


달 밝은 밤에 소주를 마시면서 ‘술잔에 달이 찬’ 경험을 이태백의 후손들은 알 것이다.

‘술 취한 달’도, 달처럼 취한 시인도, ‘술병 속에 들어 가 취기의 총상으로 부푼 아버지도’(두 팔 벌리고 하늘 향해 솟구쳐 오르던 아카로스 촛농이 비 되어 지상으로 다시) 다들 인간의 땅 지구를 바라보기는 힘이 드는 모양이다. 그러나 어찌 하리요 힘겨워도 어울려  이리저리 살아가는 것이 삶이고 나도 신 동옥 시인의 시를 읽기가 힘이 들었지만 소통하려는 노력을 통해 조금은 다가서지 않았는가. 다음에 시인은 또 어떤 모양의 시를 생산하여 내놓을지 슬며시 관심이 생겨나기도 할 만큼.


2008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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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