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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9 안티고네의 불복종 1
 

08년 작성

                    인간 역사 발전의 ‘징코민’ 불복종

                                            


‘집회 때 마스크 쓰면 징역1년’1)


 신지호 한나라당 의원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만약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그동안 마스크 착용으로 침묵시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던 행위도 징역을 살거나 오백만원이하의 벌금을 각오해야 할 판이다.

 또 같은 날의 한겨레신문에는 2011년부터 중학교에서 사용될 금성출판사의 역사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는 교수, 교사 10명이 “교과서 수정이 철회되지 않으면 교과서 집필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는 내용도 있다. 또 다른 지면에서는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파면된 모 교사의 마지막수업광경을 보도하고 있다. 1급 공무원들 일제히 자진사직서, 초등생들의 일제고사..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 80년대 전두환 시대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는 방식은 권력을 행하는 집행자에 따라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됨을 절감하게도 된다. 물리력을 동원하는방식, 회유책, 또는 위협이나 격리를 통한 사회적 관계의 단절.. ‘질서’라는 명분의 이러한 공안논리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작동된다. 그런데 법의 근원적 의미는 위험으로부터의 인민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국가권력과 맺는 계약 유지의 최소장치 아닌가.

  ‘사회제도의 가장 중요한 덕은 정의’라는 롤즈의, ‘정의론’에 따르면, 계약의 기준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해야 한다.2) 고 하고 있다. 따라서 이 계약의 원칙이 위배되었을 때, 즉 일반적이지 않거나 보편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워서 덕에 근거하는 ‘정의’에 부합하지 않을 때 계약의 의미는 없어진다 할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한 『안티고네』의 저항은 당연한 권리행위로서 회자되는 것이리라.


안티고네의 불복종


 죽음(불복종)으로 더욱 빛난 안티고네의 삶은 여성이라서 더 척박하기도 했다. 왕의 딸이었지만 권력승계는 남성으로 이루어졌고 외삼촌이 왕이 된 후 버려진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는 행위는 강한 모성이데올로기를 느끼게도 한다.


그러면 저 세상으로 가거라. 꼭 사랑해야 한다면 죽은 자들이나 사랑해라. 나에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여자가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다. (p63, 안티고네에게 크레온이 말한 대목)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범한 아버지,  그러한 부모 밑에서 끔찍한 치욕을 안고 내가 태어나다니! 나는 저주를 받고 혼인도 못한 채 가는구나. 어머니를 불행하게 만들고 오빠는 결국은 죽어서조차 아직은 살아있는 나를 살해했군요! 3)


라는 대목을 보더라도 아버지 오이디푸스 왕, 오빠들, 외삼촌으로 이어지는 남성권력 하에서 이중의 고통이 강제되는 그녀의 처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약혼자 하이몬을 각성하게 하고 크레온왕을 무참하게 만든다.

 죽은 사람을 거두어 장례를 치루는 것의 지극히 상식적인 행위를 규제한 ‘왕의 법’을 거역하는 안티고네의 행동은 보편적 상식을 행함으로서 권력자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크레온왕은 그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의 시신을 거두지 못하게 하는 위협적 통제방식을 사용하여 권위를 강화하려고 했지만 안티고네는 목숨을 잃을 각오가 되었기에 “내 목숨 말고 더 원하는 것이 있나요?” 라고 당당히 맞서며 두려움을 극복한 것이다.

 오히려 더 가엽게 느껴지는 것은 당당히 죽음을 맞이한 안티고네보다 그녀의 여동생 이스메네로 그녀는 언니의 행위를 옳다고 느끼면서도 ‘법을 어기는 행위’를 두려워한다. 이스메네는 오늘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다. 심정으로는 동의되지 않지만 ‘실정법’이기 때문에 순응하는 사람들의 모습, 이스메네의 신념이 ‘법 존중’에 있다면 안티고네의 신념은 ‘가치’에 있다고 하겠다.


‘불복종’선택인가? 강제인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에릭프롬은  ‘인간은 소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프란츠카프카도 [학술원에서의 보고]에서 주인공인 원숭이 빨간페터를 통해 상자 밖으로의 탈출을 통해 자유를 얻기까지 발생할 위험을 두려워하여 인간을 모방하고 순종하며 ‘인간화’되기를 시도하는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

 빨간페터는 원숭이사회로 돌아갈 출구 찾기를 포기하면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어차피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상자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는 해봐야 다시 잡히거나 다칠 뿐, 무익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주입하는 훈련에 적극 임하여 포도주도 마시고 보통의 호두를 깨무는 일조차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인간화’되어감으로 ‘성공’을 거두지만 훈련 중인 여자 침팬지에게서 동물의 분열과 착각이 뒤섞여 흉한 모습을 보며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에 불편해지기도 한다.  빨간페터가 ‘인간화’를 작정했을 때 이미 숲의 자유를 포기해야 하듯, 인간은 인간사회가 만들어 낸 온갖 규범과 이데올로기화된 ‘상식’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지난학기 수업시간에 본 [퀼스]는 이와 대조적이다. ‘새디즘의 선구자’ 인 사드는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성을 묘사하는 포르노물을 저작하여 일생의 3분의1을 감옥을 들락거리며 보내고, 공포정치를 하던 18세기 프랑스혁명정권은 종내는 그를 정신병동에 수감하지만 그의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신체를 속박하는 탄압은 심해지지만 자신의 저술행위가 생존의 방식이기에 어떤 굴레도 그의 갈망을 가두지는 못한다. ‘가장 자유로운 존재’ 또는 ‘단 한 점도 비열하지 않은 때가 없었던 고깃덩이’로 평가가 극명히 갈리며 ‘자유롭기 위해’ 정신병동에서 죽어간 사드와, 인간의 구조화된 ‘상식’에 맞게 자신을 적응해가는 빨간페터, 그리고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과연 누가 더 행복했을까.

 안티고네도 하이몬도 ,에우리디케도 모두 ‘죽음으로 자유를 얻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왕이 자신들의 목에 칼날을 들이댈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앞서서 자신의 생명을 끊는 행위를 가함으로 왕을 더욱 무참하게 만들었으니.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불복종’의 가치


 두세기 전 프랑스의 E,J시에예스는 작동하는 사회의 ‘합법성’이 결코 ‘적법’하지는 않음을 제기하며 ‘제3신분’들의 집단적 불복종을 ‘선동’한다. ‘노동이 체신없는 일로 여겨지는 나라, 소비하는 것이 존경스럽게 여겨지고 생산하는 것이 창피스러운 일로 여겨지고 힘든 작업이 천한 것으로 이야기되는 나라’ 인 당시 프랑스사회의 ‘제3신분의 자기자리 찾기’를 강조하며  독설을 내뱉는 것이다.


볼품없는 지주목에 의존해 기교적으로 서있는, 붕괴위험이 있는 집에 그대로 있으면서 곤궁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다 종국에는 그 잔해더미에 깔려 으스러지는 것을 택할 것인가? 모두의 자유와 발전을 위해 악성고름인 귀족의 특권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동의하지 않는다면 계속 병든 채 살아가라.4)


 정치의 민주적 정도에 따라 ‘자발적’ 법위반자들의 숫자도 달라지는 것 같다. 박정희 정권시절 반공법과 긴급조치 등으로 많은 사람들은 타의 반, 자의 반 법위반자가 되었다. 일탈적이거나 도덕적 개념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가치를 법이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를 발전시키는 투쟁은 언제나 차별과 억압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따라서 ‘불복종’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복종이 ‘미덕’이던 시대도 있었지만 그것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에게 강제되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착한 딸이며, 오빠들의 고운 딸이었던 안티고네가 공포스러운 권력자 앞에서 저항함으로 자유의 정신은 살아나지 않았던가. 그녀의 신념은 정치를 바꾸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이스메네의 신념은 자신을 묶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여 결국 정치체제를 강화해주는 역할로 나타날 것이다. 결국 모든 역사는 가정에서부터 사회와 국가에 이르기까지 결코 완벽할 수 없는 ‘규범’들의 간극을 메워가는 불복종의 용기에서부터 발전해가는 것 같다.


맺음


 논리가 비약된 감이 있다. 그렇다면 법은 지킬 필요가 없는가? 물론 그건 아니다. 법은, ‘평등한 자유가 위반되었을 때’ ‘정의가 파괴되어 있을 경우’ 에 시민불복종을 할 수 있다는 전제에 의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실정법’을 어긴 경우 받게 될 ‘법적처벌’에 순응할 각오 또한 내재되어 있다. 결국 시민적 불복종 행위는 공중의 동의를 집약하기 위한 선동행위인 것이고 희생과 헌신을 동반한다. 또한 불복종의 행위에도 공익적 불복종과 사익적 불복종도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공익 속에도 사익이 내포되어 있지만 대중의 공감을 형성하기 어려운 행위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계를 명백히 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을 것 같다. 이를테면 시청료납부거부운동, 낙천낙선운동, 징병거부운동, 올해 전국을 달구었던 광우병소 수입반대운동, 의약분업항의...80년대까지도 묶여있던 노동삼권 중 단체행동권, 공무원들의 노동조합 결성금지 등 숫한 저항과 구속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법도 모두가 공중의 공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기준은 무엇일까?

 안티고네는 ‘왕의 법’을 따르지 않되 ‘하늘의 법’을 따르겠다고 했다. 지금의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체제에서 ‘왕의 법’은 문서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시민의 권리를 위임받은 정치권력이 최소한의 질서 틀이어야 할 법의 얼굴을 바꿔 시민을 박해할 때 불가피하게 ‘영향의 정치’인 불복종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법의 질서를 조절하기 위한 불복종의 행위, 강력한 성분을 지닌 한 알의 ‘징코민’ 지금 정말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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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