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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19 그 길모퉁이 시인의 마을
 

세상읽기] 그 길모퉁이 시인의 마을 / 김별아 (소설가)

전날 마신 술이 덜 깨어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나, 시 쓰는 송경동인데… 별아씨, 맞나요?”


어눌하면서 약간 더덜거리는 말투, 그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선배, 미안해요. 고생하신다고 들었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아니,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신작도 나왔던데 열심히 쓰는 게 부러울 뿐이지. 그런데 말이야, 내일 시간 좀 내면 안 될까? 바쁜 거 알지만 부탁할게요….”


그의 청은 아무래도 거절할 수 없었다. 미안하고 고맙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내가 어쨌거나 평안한 작업실에서 혼자만의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그는 내내 길 위에 있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농성장에서,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과 함께, 그리고 지금은 용산 철거민 투쟁 현장에서, 그는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었다. 내가 누리는 평온이나 평화라는 것은 언제나 누군가의 땀과 피에 빚진 것이다. 시인 송경동은 그런 나의 빚쟁이 중 한 사람이다.


140일 전의 그 겨울 아침처럼 하늘은 무거운 잿빛이었다. 지하철 신용산역 2번 출구로 나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주변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 와이셔츠와 제복 차림의 회사원들이 식당을 찾아 흩어져 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길을 물어볼까 망설이다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뭐라고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기요, 여기 용산참사 현장이 어디 있나요? 불붙은 망루가 무너져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 회원들과 경찰특공대까지 여섯명이 사망한 그 참사 현장 말이에요.”



하지만 상상 속의 끔찍하고 무서운 사건 현장은 어디에도 없고, 실제로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었다. ‘철거와 상관없이 영업합니다’라는 펼침막을 내건 식당들은 점심 장사에 바쁘고, 초여름 날 짧은 치마를 걸친 아가씨들의 다리는 눈부시게 미끈하고, 퀵서비스 오토바이는 곡예운전을 하며 지나가고, 차들은 신경질적으로 빵빵거리며 체증을 견디고 있었다. 누가 어떻게 죽어도 일상은 무서우리만큼 무고했다.


‘용산참사 140일 해결 촉구 및 6·10 항쟁 22주년 현장 문화제-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140인 예술행동’은 그처럼 끔찍하지만 막강한 일상 속에서 진행되었다. 시인과 소설가들은 벽시와 벽글을 쓰고,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고, 가수들은 노래를 하고, 사진가들은 사진을 찍었다. 그곳에선 슬픔도 분노도 투쟁도 일상이었다. 분향소에서는 화분들이 꽃을 피우고, 용역들은 틈틈이 밥값을 하기 위해 시인과 화가들이 벽에 붙인 꽃 장식을 뜯었다. 눈물마저 말라버린 유가족은 만화가들이 그려준 캐리커처에 웃고, 포크록과 풍물이 민중가요와 어울렸다. ‘도심 테러리스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온 눈이 예쁜 젊은 신부님은 낮술에 취해 있던 시인들과 순댓국밥을 나눠 먹었다.


길바닥에서 먹고 자고 싸우느라 새카맣게 타버린 송경동 시인은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난 게 반가워 연방 벙싯거렸다. 우리도 평소대로 술타령만 말고 뭐라도 해야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가 답했다.


“시인과 작가들은 술 먹는 게 투쟁이지! 여기서 이렇게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그는 여전히 투사이기 전에 시인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싸우면서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실로 그가 있어야 할 곳은 평화로운 시인의 마을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있기에 그 길모퉁이 살벌한 참사현장이 시인의 마을이다. 억울한 영혼들의 의로운 벗, 그가 바로 시인이기에.

-한겨레신문 6월 18일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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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