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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07 성적 소수자들의 목소리
 


                              성적 소수자들의 목소리

                                        


 초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 중 한명이 대학생이 된 후 동성연애에 대해 이야기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땐 ‘참 이상한 이야기도 다 한다’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그 친구가 우리 친구 중 한 친구를 애틋하게 대했던 것 같기도 하다.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할 때도 특별히 늘 붙어 다니는 두 여성이 있었다. 한 친구는 중성적 이미지였고 또 한 친구는 곱게 머플러를 두르고 다니는 ‘여성스러운’ 여성이었다. 가끔 다른 방에서도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들로 수근 거리기도 했던 것 같다. 뭔가 금기시된 어떤 것들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듯, 야릇한 느낌이 들었던 기억.

그렇게 ‘벽장’을 깨지 못한 성적 정체성들은 혼란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성적 소수자의 문제를 다룬 세편의 논문을 읽으며 그동안 막연히, 그저 인권적 담론으로만 이해(?)해왔던 트랜스젠더의 문제를 훨씬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번호이동과 성전환-주민등록제도, 국민국가 그리고 트랜스젠더」를 통해서는, 신분증명제도가 자신의 무엇을, 어떤 상황을 증명한다는 의미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게 한다. 신분증명 제도를 통한 여러 차원의 통제방식이나 규율. 강제에서 나아가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젠더를 두 개로 이분화하여 통제하는 방식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다.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 중에서는 강지영의 논문「문제적인 젠더」를 읽었다.

이 논문을 통해 “퀴어이론문화연구모임 WIG" 라는 생소한 연구모임을 접했고 이 모임은  ‘젠더이분법적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적 쟁점들에 문제제기하고 젠더를 재구성하는 상상력을 발휘해보자’는 취지의 활동들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의 질문은 ‘젠더의 사회적 구축을 남성이나 여성의 신체중 하나에만 제한해야 하는가?,또 그러한 구축이‘엇갈리고 엉킬 수는 없는가?’ 라는 것이다. 왜 이런 생각, 그동안 해보지도 않았을까?


벽장비우기(한채윤) 에서도 이성애 섹슈얼리티의 ‘정상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즉 동성애가 무엇이고 레즈비언이 누구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애자가 다수이고 정상’이라는 전제자체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다.

‘그녀애자’라는 독특한 개념(?)도 새롭다. ‘그녀애자’는 동성애자가 아니라도 현재 사귀는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경우를 말한다. 반드시 이성애자나 동성애자가 아니라 성적 이끌림이 닿는 경우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는 개념인 것 같다. 


과연, ‘남성’이 ‘남성다워’야 하고 ‘여성’이 ‘여성다워야’하는 것으로 길들여지면서 ‘정상성’의 기준에 맞게 성적 정체성도 구성되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 하게 된다. 혹 내게는 그런 요소 없었을까, 나의 성적 정체성도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것일 수도?

벽장 밖으로 나온다는 의미라는 커밍아웃, 즉 ‘벽장’에 대한 다른 해석도 의미 있게 와 닿는다. 이성애자들은 나와야 할 벽장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사실은 ‘세상 전체가 벽장’인데 용기 있는 동성애자가 커밍아웃을 통해 벽장 밖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준다는 것,

그러게, ‘나는 이성애자다.’ 라고 커밍아웃 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필자는 벽장 안에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깨닫지 못하거나 낯선 환경으로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갇혀있다는 것이고 벽장 밖에서(커밍아웃 한 사람들) 오히려 이 벽장 안에 대고 묻는다는 것이다. ‘당신의 성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 말은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에 대해 권리를 인정해주느니 마느니 하는 것의 ‘자격’을 묻는 것이다. 동성애자도 이성애자도 모두 만들어진 ‘이름’이고 ‘규정된’ 개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10대 레즈비언의 기사를 다룬 한겨레21에서 ‘여고에 다니는 남학생’ 이 ‘치마를 입고 있으면 벗은 것 같아’ 날마다 ‘여자냐, 남자냐’나무라는 교사들과 전쟁을 치르고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 차별받기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성적 정체성을 숨기며 사는 경우들도 있었다.(아니 수없이 많을지도) 

이러한 현실들에 대해 위의 논문들은 소수자를 배려하라거나 이해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즉 누가 누구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상성’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준은 사실 많은 인권담론들에도 내포되어있는 문제일 것 같다.

한 채윤은 말한다.‘사람들은 성차별이 싫으면 성전환수술을 하라고 할 수 없고, 흑인에게 인종차별이 싫으면 피부색을 표백하라고 할 수 없지만, 동성애자들에겐 이성애자가 되라는 주문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것, 즉 사적영역, 선택의 영역으로 ‘몰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성적 정체성의 차이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삶’의 문제라고 말한다. 앞에서 언급된 그 고등학생도 어른들이 말리다 안 되자 ‘그럼 어른이 되고나서 수술하라’고 했다는 것은 어른이 되면 사회화를 통해 ‘정상’이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휴, 그런데 참 어렵기도 하다. ‘제가 이성애자라서 동성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유쾌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담론들은 저만큼 앞서있는데 사람들의(나의) 의식은 지체 상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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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