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이후'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05.05 탈 쓰고 춤추던 ..
  2. 2009.05.10 내 안의 나
  3. 2009.03.14 그들은 왜 대학 강의실에 있는가?
  4. 2009.03.14 원고
  5. 2009.03.14 어머니!
 

원풍노조 탈춤반을 회고하며.

             


탈춤불량품!


나는 춤을 잘 못 춘다.

아니 못 추는 정도가 아니라 박자 맞춰 고개를 끄떡이는 정도도 어색하다.

그런 내가 한때 탈춤을 했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때로 믿기 어렵다는 야릇한 표정을 짓는다.

사실 내가 춤을 춘다는 건 어느 모로 보나 어울리지 않음은 분명하다. 야유회나 노래방엘 가서 분위기가 고조되고 춤판이 벌어져도 도무지 몸이 펴지지 않고 되려 슬며시 짜부라드는 느낌을 갖는 내가 춤이라니? 그러나 탈춤반 ‘회장’에 ‘연구부장’에 나름 감투도 썼다는 사실은 엄연한 ‘역사’다. 물론 탈춤 반에서 내 별명은 ‘탈춤불량품’이었지만... 원풍노조의 가장 ‘시끄러운 조직’ ‘결속력이 강했던 조직’ 이었던 탈춤반, 우리 광대들의 불림과 춤사위들이 다시 보고 싶다.


원풍모방노동조합의 여러 소그룹 중에서도 탈춤반은 특히 조합원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으며 으쓱대고 다녔던 그룹이었다.

9.27사태이후 모임공간도 없어지고 구성원들도 흩어지기 전까지 원풍노조 탈춤반은 대내외에서 10여회의 탈춤공연을 했다.

체육대회같이 기쁜 행사에는 잔치마당을 장식하고 노동절이나 농성 시에는 조직을 단단히 강화하는 역할에 일조했으며 깨지고 피 터지는 현장에서는 마치 무당이 작두위에서 맨발로 뛰는 심정으로 설움을 토하고 미래를 기원하며 춤추었다.

양반탈을 쓰고, 그 양반을 비웃는 기생탈도 쓰고 고관대작이 되고 어용노조 지부장이 되고 ‘오적’을 능멸하고 타파하는 ‘말뚝이’가 되는 순간, 조합원들도 모두 ‘말뚝이화’ 하여 하나의 함성과 눈물이 되기도 하였던 조직, 원풍과 함께 사라져버린 탈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불문하고 축제의 마당에는 늘 그 축제를 축제답게 북돋아줄 가무가 뒤따른다. 재산이 많던 적던, 직위가 높던 낮던, 위로는 궁중에서부터 아래로는 백성의 작은 마당까지 형식과 내용은 달라도 노래나 춤은 있어왔다. 궁이나 대가에서 벌이는 호사스러운 가무에 비해 백성의 작은 마당에서는 판소리 한 자락, 민요 한 자락이 불려 지거나 하다못해 막걸리잔 놓고 젓가락을 두드릴지언정 장단은 존재한다.

또한 춤과 노래는 좋을 때나 기쁠 때만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궂은일의 액을 풀기위한 무당의 춤이나 사설, 무탈을 빌며 행하던 풍어제나, 서러운 한을 풀기위한 비나리 같은 것도 생활의 한 부분으로 이루어져왔다.

원풍노조의 탈춤반도 그런 맥락과 더불어 노조의 조직적 의도가 더해진 노동자문화패였다.

시작은 노동조합의 조직역량강화정책과 노동자문화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지만 기숙사와 노조사무실 옆에 붙은 광고를 보고 하겠다고 모여든 조합원 중에는 노조활동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경우도 많았다. 그저 춤추는 것이 좋아서 공짜로 배울 수도 있다니 참여한 경우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의식화’ 되어 훌륭한 조합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애초에 탈춤반에는 조직부장 이었던 이필남선배가 지도위원으로 참여하면서 틈나는 대로 함께하고 교육프로그램을 챙기고 이런저런 필요한 지원을 노조차원에서 수행하는 일을 하였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당시 탈춤반 교육프로그램을 보면 ‘노동운동의 역사’ ‘도시빈민운동 관련 비디오 시청’ 등이 중심이었고 거기에 ‘가면극의 역사’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본은 같이 모여앉아 대사 한마디씩을 구사해가며 창작 했고 때로는 ‘노가바’ 도 만들어 농성장이나 행사 때 부르기도 했다.


공연


79년 1월에 시작된 탈춤반의 첫 공연은 79년 3월 10일 노동절이었다.

이때 원풍노동조합은 노조결성이후 가장 강력한 역량을 확보한 시기였고 내부적으로 별 문제가 없던 때였다. 당시 공단의 노동자들이 취업하고 싶은 사업장으로 꼽던 곳이었고 타 노동조합들도 원풍노조를 다녀가면서 부러워하던 때였다. 대외적으로는 유신독재의 폭압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고 주변에는 방림방적, 남영나일론, 동일방직 해고자 문제 등, 어용노조나 노총 등 상위단체의 어용성이 노동자들을 이중으로 억압하던 때였다. 따라서 이날의 내용은 고급관리들과 어용노조 대표들, 비호세력들 등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이 중심이었다. 양반탈을 쓴 광대가 등장하여 갖은 추태와 작태를 드러내고 그 판을 ‘말뚝이’ 로 상징한 노동자가 등장하여 격퇴해가는 장면들이었다. 양반들의 식탁에는 “원숭이의 해골찜, 코끼리의 히프찜..”등의 산해진미(?)가 차려지고 양반들이 어기적거리며 탐욕스럽게 등장한 후 ‘안몰라’ ‘임꼬셔’등의 이름을 지닌 기생들이 요염한 춤을 추며 등장할 때마다 강당에 모인 조합원들은 배꼽을 쥐었다. 그리고 기상 있게 말뚝이가 등장하여 그들을 조롱할 때는 모두 박수를 치고 요절복통하며 통쾌해했고 말뚝이의 빛나는 승리를 행복해하며 구호를 함께했다.


그해 가을 운동회 때는 마당의 성격에 맞게 풍물놀이를 했다.

장구, 북, 꾕과리, 징으로 한바탕 운동장을 휘감아 도는데 풍물팀의 꼬리에는 잡색이 따라붙었다. 그날 나는 찢어진 옷과 깡통을 들고 문둥이 탈을 쓴 잡색이었다.

손과 발엔 시커멓게 검정칠까지 한 채 춤을 추며 본부석으로 어정거리며 들어가서 깡통을 흔들어대자 “저게 누구야?” “아유 저 거지 불쌍하네.” 라는 농지거리가 들렸고 깡통에 동전들을 던져주기도 했다. 거지의 정체를 아는 직포과의 연숙이가 달려오더니 “남수야 어쩌면” 하며 거지차림의 내 모습을 끌어안았다. 순간 문둥이 탈, 찢어진 옷, 깡통, 이런 것이 나를, 또 연숙이와 우리들을 드러낸 본 모습인 것 같은 어떤 서러움이 왈칵 밀려와 같이 끌어안고 울었다. 문둥이 탈속에서 흐르던 눈물, 나는 그 기억을 잊지 못한다.

이렇게 행사 때 마다 대미를 장식하던 탈춤반이 결정적으로 된서리를 맞게 되는 것은 80년 ‘광주의 봄’ 이후였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연루’ 운운으로 지부장과 부지부장이 수배되어 잠적한 후 정국이 스산하고 가파르던 때였다. 조여 오는 마수를 느끼며 불안과 긴장 속에서 추석을 맞이했고 귀향하지 못한 조합원들과, 비상대기 상태이던 노조 간부들이 모인 기숙사에서 공연을 했다. 대본의 주제는 당시 전두환 군부의 주도하에 노총을 통해 조직적으로 진행되던 ‘노동계정화조치’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었다.

이 내용은 정보기관으로 들어갔고 그해 12월 계엄사에 끌려갔던 우리는 “정화 좋아하네, 어디 여기서도 한번 해보지?” 라며 군인들에게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탈춤반 회장이었던 나와, 총무였던 두숙이가 계엄사에 의해 강제해고를 당한 것은 탈춤반활동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있다.


이 후부터 나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탈춤반은 새로운 인원을 충원하고 어려운 대내외적 조건을 극복하며 맥을 유지했다. 81년에는 전북전주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에서도 공연을 했고 9.27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인 82년 8월 13일에는 ‘민족과 민중의 통일을 위한 전진대회’가 열렸던 한신대에서도 일제시대 ‘조선방직쟁의’를 다룬 공연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공연이 노동조합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던 마지막공연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탈춤반을 통해 이루어졌던 소박하지만 따뜻했던  ‘연대’


탈춤반의 활동을 말하자면, ‘명예조합원’이 되어 탈춤지도를 했던 대학생들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은 학업시간을 쪼개어 매주 2~3회 원풍으로 왔다. 당시엔 그 어디에도 사용가능한 번듯한 강당하나가 없었던 시절이다. 원풍기숙사 강당이 있었지만 교대반의 휴식에 방해가 되니 사용할 수 없었기에(금남禁男의 집이니 더욱) 뙤약볕이 쬐는 시간을 피해가며 기숙사옥상에서 ‘덩기덕’ 거렸고 업무시간 후의 노조사무실에서 대본을 만들고, 가끔 돈보스꼬센타를 빌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탈춤반 대학생들이 원풍모방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조합원 아줌마들이 밥도 푹푹 많이 퍼준 것으로 기억된다) 경비실의 눈치 보지 않고 드나들었으니 돌아보면 노동조합의 조직역량이 막강하던 시절이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탈춤지도’란 명분으로 함께했던 대학생들의 역할은 ‘연대’ 적 관계였다 할 것이다. ‘노학연대’는 최루탄 난무하는 아스팔트길을 함께 달리는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70년대 원풍노조의 탈춤반에서 이런 방식으로도 실천되고 있었다.

그 후 82년 9.27 사건 마지막 날, 모두 끌려나오던 10월 1일 새벽, 이리떼에 쫒기는 양떼처럼 대림동의 양문교회 새벽예배 장으로 피해 픽픽 쓰러지던 조합원들을 병원으로 업어 나르던 남자조합원들 속에 눈에 익은 얼굴하나가 보였다. “아, 00 형!”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탈춤 지도 팀' 중 한명이었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서 있다가 말 한마디 없이 쓰러진 조합원을 업고 병원으로 뛰어다녔다.(지금은 그 이름을 말해도 되겠지, 그는 원호 형이었다) 그 밤을 그도 함께 원풍모방 앞에서 지새우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아무 말도 못했지만, 먼 날들 뒤돌아보면 ‘연대’의 따뜻함에 콧등이 찡해지는 기억이다.


연대는 결국 관계의 힘일 것이다. 의식이나 상식 이전에 감정과 느낌으로 연결된 관계들의 결합이 강고한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그’가 그곳에 있기에, ‘그’가 하는 말이기에, ‘그’가 하는 일이기에, 나도 함께하게 되는 어떤 것.

내가 하고많은 공장 중에 원풍에 입사하여 노동조합을 알지 못했다면, 하고많은 사람 중에 ‘그’ 또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하고많은 조직들 중에 탈춤반에 들지 않았다면...그렇듯 만나고 맺어지는 인간관계들이 내가 서 있을 곳을 위치 짓거나 내가 하게 되는 언어를 구성하거나 내가 취할 몸짓을 만들게 되는 것 같다. ‘나’의 많은 것들, 아니 어쩌면 모든 것들이 이러한 관계 맺기 들로 부터 이루어지고 깨지고 작동하게 한다. 어떤 이가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가를 보며 그 사람의 성향을 예단하거나 특칭 해버리는 경우도 ‘관계’의 영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도 내 옆자리 친구의 감기가 더 걱정되는, 그런 것이 사람이다. 머리로 다지는 의식과, 몸으로 느끼는 감정은 흐름이 달라진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관계맺음을 하는 것이 나와 우리를 평화롭게 할까?

또 원풍노조(원풍사람들) 와의 관계맺음은 지금 나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


원풍의 탈춤반이 특별히 결속력이 단단했던 것은 관계 맺기에 들인 노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주 2회 이상의 만남, 연습하고 대본 만들고 공연하고 뒤풀이하고 같이 먹고 일했던 시간들의 축적과  거기에 더해 함께했던 대학생들의 역할이 윤활유로 작용했다 할 것이다.


이제 원풍에서 함께했던 사람들, 그 모든 기억의 편린들도 30여년 고개를 넘어가려한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이 관계의 끈을 놓지 않고(놓지 못하고?) 담아온 이야기들, 한탄들, 기쁨들, 서러움들, 반가움들을 하나하나 고이 담아 구슬 꿰듯 꿰어보고 싶다.

우리는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바라보았는지, 무엇을 얻었고, 무엇으로 살고 있는지...

답답한 세상근심 툭 털고 나와서 말뚝이, 할미, 문둥이 다 모여 장구치고 북치고 꾕가리 치며 흥지게 한번 놀아보고 싶은 마음 한 자락 지니며 탈과 함께했던 그날의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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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

내 안의 나

보호글 2009. 5. 10.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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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대학 강의실에 있는가?

보호글 2009. 3. 14.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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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보호글 2009. 3. 1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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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보호글 2009. 3. 1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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