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한번 해보자, 로 시작된 신정문화답사여행이 올해로 다섯 번째가 되면서 더욱 내용이 실해지네요.”
많은 사람들의 행복한 여행을 꾸리느라 애쓰시는 어느 선생님의 자평처럼 강릉문화기행은 알차고 튼실했다.
아침 8시약속이 이른 감이 있는데도 거의 지각없이 출발이 순조로웠고 공사다망한 일정으로 여행 동반은 못 하면서도 따끈한 떡을 제공해주고 가신 K선생님의 정성으로 믿고(?) 굶고나온 뱃속도 든든해졌다.
일 년, 또는 이년 만에 뵙는 분들도 이젠 얼굴을 다시 익힌 탓에 반가웠다.
김교수님의 강의는 우리가 가는 여행지에 대한 안내부터 시작되었다. 경포대 옆에 위치한 해수욕장을 ‘경포대해수욕장’으로 표기하는 것은 잘못이고 ‘경포해수욕장’이라고 해야 맞다 는 것이었다. 강릉의 원래명은 ‘명주’이며 여진족의 땅이었다는 것, 왕건시대에 대한 해석과 고려의 역사를 이어 신사임당으로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여성인지라 특히 신사임당(신인선)에 대한 해석이 재미있었다. 고려는 경제적 남녀평등이 이루어지고 과부의 재가가 허용되는 등 비교적 민주적이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였다. 그런 고려시대의 풍습이 바탕 된 강릉의 여성 신사임당은 현모이긴 하지만 결코 양처라고 볼 수는 없다는... 더불어 그녀의 뛰어난 재능은 강릉의 풍토에 기인하여 탁월하게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유추다. 그녀의 남편 이원수는 ‘장가’를 와서 처가에서 빈둥거렸고 보다 못한 신인선은 10년의 별거를 선언했다. “고시 합격하고 오라” 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원수는 계속 패스를 하지 못한 상태로 낙향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신인선은 한달음에 달려 나간다. 그들이 중간에서 만난 지점은 양평이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급제하지 못한 남편을 고향에 들이지 않겠다는 신인선의 다급함(남편을 그 꼴로 친정에 발 딛게 할 수는 없는)에 비해 남편은 터덜터덜 겨우 양평까지 왔던 것이다. 이날 양평에서의 해후가 이율곡을 탄생케 했다는...그렇게 신인선은 양평에서 남편을 다시 서울로 되돌려 보냈고 13년 만에 과거에 합격을 한다. 하긴 남편을 기어코 과거에 급제하게 했다는 측면에서 ‘양처’라고 했을 수도 있지 않은지? 아무튼 신사임당도 “양처는 아니었다.”는 해석에 살짝 위안이 되기도 했다.
혼인 후에도 내내 친정에 머무르던 신인선은 서른일곱 살이 되어서야 서울로 갔고 강한 기를 지녔던 어머니와 강릉의 풍토로 율곡도 늘 강릉 외갓집에 자신의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남편은 착하기나 하지 허초희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은 밖으로만 돌며 허초희를 박대”했으니 강릉의 여걸들은 남편 복이 없었나 보다.
허난설헌을 읽으며 아려오던 기억을 교수님이 다시 재생 했다. 더구나 성악가인 학생(?)을 특별히 지명하여 낭랑한 목소리로 허초희의 시를 낭송하게까지 하셨으니, 다양한 교수법으로 학생들을 집중하게 하시는 강의의 달인이시다.
조선시대 강원그룹 본사 및 회장댁이었던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에 의해 처음 지어진 후 증축을 거듭하며 오늘까지 운치를 자랑하는 가옥으로 보존되고 있다. 귀한 손을 맞이하는 정자로 사용했다는 연못위의 활래정은 날아갈듯 했고 안채, 동별당, 서별당, 중사랑, 행랑채, 사랑 등 열두 대문을 지닌 고택은 멋들어지게 운치를 풍겼다. 특히 자연 그대로 후원이 되는 집 뒤의 소나무 숲이 참 멋지다.
여행의 즐거움은 별미를 통해 배가되는 법, 창녕조씨 종가의 향토음식은 아주 좋았다. 조씨댁 종부께서 음식 만들던 차림으로 와서 굳이 이 음식들이 얼마나 정성스럽고 좋은 음식인가를 강조하며 자부심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미 맛으로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송죽두견주’라는 이름의 술은 솔향기와, 대나무 잎 흔들리는 소리가 들릴듯한 맑은 빛깔에 분홍빛진달래 잎이 동동 떠 있어 맛도 보기도 좋았다. 이 맛난 음식들에는 종수선생님의 마음이 담겼다. 언젠가 성공회대 식당에서도 밥을 사주셨는데..
맛있게 음식을 먹는데 한 학생이 먼 자리에 계신 교수님 불러 국이 나오냐, 찌개가 나오냐 질문을 하는 바람에 폭소가 터졌다. 아니 식당에서 국 나오는지, 찌개 나오는지도 교수님께 물어야 될 사항이냐고요?? 그런데 그게 또 그렇더라. 나도 이미 반백이 넘었지만 이 자리에 오면 열일곱 살 학생으로 돌아가서 마냥 천진해지고 그저 졸졸 따라 다니며 만사 내려놓는 ‘학생’ 이 되거든.
경포대에 올라서니 정말 만사 뒤로 하고 늘어져 동동주에 달 띄우고 싶었다. 경포대와 관련된 문화적 학술적 해석은 다 까먹고 경포대에 서면 여섯 개의 달이 뜬다는 내용만 선명하게 남는다. 즉 하늘에 뜬 달, 술잔에 잠긴 달, 호수에 비친 달, 바다에 잠긴 달, 임의 눈동자에 담긴 달, 내 눈동자에 담긴 달, 그렇게 여섯 개의 달이 그윽하게 스며들었다.
그런데 경포대를 내려와 버스를 탔는데 차에서 기다리시던 기사님이 교수님의 마이크를 갈취(?)하여 방송을 하신다. “여러분, 경포대에 달이 몇 개 뜨는지 아세요? 경포대에는 달이 다섯 개 뜬답니다. 하늘에 하나, 바다에 하나, 호수에 하나, 술잔에 하나, 임의 눈동자에 하나랍니다.” “와~~짝 짝”시침을 뚝 떼고 우리는 일제히 박수를 쳤다. 다섯 개든 여섯 개든 그게 뭐 대수겠는가. 우리일행을 즐겁게 해주려는 기사님의 마음에 보내는 합의된 심정적 동의, 그거면 됐지.
애초 예정에는 없었던 행선지이지만 지척에 바다를 두고 그냥 지날 수는 없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백사장에 잠시 퍼지고 앉아 ‘해변의 여인’ 또는 ‘남자’들이 되어 폼 잡고 사진도 찍었다.
다음으로 강릉객사와 그에 딸린 관사를 둘러보았다.
나라의 귀한 분들의 숙소였던 강릉객사는 정교하고 지혜로우며 장인적 뚝심이 묻어나는 건축물의 웅장함을 느끼게 하였다. 그 옆의 관사는 일이년마다 부임지를 옮겨 다니는 사또보다, 붙박이 권력으로 서민을 수탈하던 하급관료들의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수탈을 용이하게 하며 권위를 강화하는 ‘과학적’ 술수가 묻어나는 공간배치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못된 관리들에게 고통 받았을 민중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허초희 생가에서 뒤뜰의 화초들 중 한 종류 앞에서 모란이다, 목단이다, 함박이다 로 각각 진단하는데 한 분이 그게 다 같은 거라고 하니 또 다른 분이 조금씩 다르다 하고.. 결국 아무도 자신 있는 경우는 아니었던지 돌아가서 확인해보자 했는데 아직 확인을 못했다.
허초희 생가를 돌아 저녁식사를 할 곳으로 향했다. 춘천막국수와 수육을 하는 곳이었는데 음식의 맛 보다는 한적한 곳에 위치해있고 방이 넓고 편안해 귀가하기전의 뒤풀이장소로는 좋았다. 답사일정을 잘 보낸 느긋함으로 가볍게 술도 한잔씩 나누고 저녁을 제공해주신 욱동 선생님께 아낌없는 박수도 드리고.
즐겁고 맛있고 유익한 문화답사였다.
‘한 땀 한 땀’ 꿰어야 명품이 되듯 한 분 한 분 더불어서 빛나는 인연이 행복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