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엄마와 함께 차도 다니지 않는 산골이었던 외갓집에 간적이 있다. 집안일이 끝나지 않아 그랬겠지만 늦은 출발로 외갓집으로 가는 고정리의 초입에서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고 갈 길은 멀었다. 택시도 들어가지 못했던 것인지, 아예 탈 엄두를 못 냈던 것인지 무작정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을 깊은 산길이었다. 다행히 환한 달빛이 길을 밝혀주었다. 달빛 아래로 물빛이 반짝이는 징검다리 개울도 건너가며 엄마와 걷는 동안 달빛에 흔들리는 나무들과 푸드득거리는 소리들은 때로 오싹 소름을 돋게도 했던 것 같다. 두려움은 드러내면 더 두려워지는 법, 나는 내색도 못하고 엄마 손만 잡고 열심히 주절거리며 걸었었다.
훗날 생각해보면 그래도 엄마는 고달픈 시댁을 벗어나 객지에 있던 딸이 와서 함께하는 친정 행 외출이었기에 걸음은 가벼우셨을 것도 같다. 그리고 그때 나는 정말 순박하고 따뜻한 소녀이기도 했다.
지금은? 절대로 아니다. 그 이후의 나에게 세월과 사회는 늘 가슴 한구석 분노와 서러움 같은 것을 지니게 하였고 마음을 척박하게 만들었다.
수술날짜를 며칠 앞두고 사흘가량의 외출퇴원을 한 엄마는 아무말씀을 하시지 않지만 뭔가 느낌이 있으신지 시골에 다녀오고 싶어 하셨고 모시고 다녀오기로 했지만 날씨도 너무 좋지 않고 체력적으로도 오늘 갔다 내일은 와야 하는 상황이 쉽지가 않아 포기하셨다.
그때 이후 엄마와 단둘이로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여행을 준비했는데...
엄마의 시골계획취소가 체력의 문제만이었을까? 혹 고3딸을 둔 나의 여러 가지 조건을 염두에 둔 마음쓰임 때문은 아니었는지, 워낙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하시는 성격인데, 더구나 모시고 가겠다고 나선 사람이 하필 나여서 더 그러셨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점심때 엄마를 모시고 유기농 채식식당에 갔다.
며칠째 제대로 식사를 잘 못하셨는데 담백하고 단정한 식단이 나쁘지 않으셨는지 비교적 잘 드셨다. 입원하여 온갖 검사를 받고오신 이후 집안공간은 몹시 답답해하셔서 오후 내내 비를 피해가며 밖에서 보내고 동생네식구들과 합류하여 저녁식사까지 마친 후 남동생 집으로 들어가셨다.
담도암은 수술 외에 달리 치료방법도 없다하고 긴 시간을 요하는 어려운 수술이라 하니 어찌 견뎌내실 수 있을지, 일주일간의 입원이후 더욱 핼쓱해지고 조금씩 더 고통이 가중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
여기저기 물난리가 났다는 장마,
밤새 내릴 듯 빗줄기가 거세어지고 천둥번개가 친다.
올해는 어찌 이리 개인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안좋은 일, 슬픈일들이 많은지..
마음도 장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