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오사무의 '인간실격'감상>
어느 부적응 지식인의 인간파멸 기록
인간의 자격이 무엇일진대 실격하는가? 제목이 흥미로웠지만 솔직히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소설에 담긴 심오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지만 왜 이렇게 살다 죽어야 하는가? 내가 너무 인간의 내면적 고뇌에 대해 무지몽매해서일까 또는 현실적 삶에 찌든 탓인가, 어쩐지 창백한 지식인의 어리광 같아 보이는 이런 작품, 이해하기 어렵다. 왜 작가는 이렇게 우울한 작품을 썼을까? 작가의 프로필을 확인해본 순간 이해가 되었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랐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마르크스주의가 들불처럼 번졌고 자신의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대지주가 된 신흥졸부라는 사실에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느낀다. 혁명에의 공포와 출신성분에 대한 고민 속에 고교 3학년 때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도쿄대학에 입학한 후 좌익운동에 가담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합법 정치운동이 맞지 않아 갈등한 것으로 보이며 까페 여급이었던 연인과 동반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연인은 죽고 홀로 살아남기도 한다. 이후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하고 소설도 발표하다 서른아홉 살에 또 다른 연인과 함께 다섯 번째의 자살기도로 생을 마감한다.1)
결국 이 소설은 작가의 삶이었다.
작품 속 화자는 시골마을에서 별로 어려움 없이 자랐다. 그러나 늘 병약하여 앓아눕는 적이 많았고 어머니도 병약하여 어머니의 사랑이 부재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머니의 관심을 받지 못한 막내는 정서적으로 더욱 허약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화자는 ‘어머니를 따라 상경하던 기차 안에서 객차 통로 중간에 있는 타구에 오줌을 누는’ 행동을 한다. ‘일부러 개구쟁이 짓’ 하느라 그랬다지만 한편에는 어머니의 관심을 갈구한 행동 아니었을까? 그리고 화자는 ‘배고픈 감각’을 모르고 자란다. 배를 채우는 것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삶의 조건인데 식사시간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그의 불행한 삶을 예고하는 듯하다. 식탁의 풍경도 일반적인 가정의 풍경은 아니다. 막내가 맨 끝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식사시간마저도 나이나 권위에 의해 서열종대가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더구나 사람들은 밥 먹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배고픈 감각도 중요함도 느껴지지 않는 자신에 대해 매우 불안해한다. 그래서 다르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배고프다’는 연기를 하기도 하고 남의 집에 가면 더 많은 음식을 먹는 등 본심을 속인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는 공포스러운 권력이었다. 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지만 순응하지 않았을 때 ‘돌아올지 모를 보복’이 두려워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위장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 대목에서 이러한 상황설정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마르크스주의에 대한)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유하지만, 배고픈 척 해야 하고, 강제된 권위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해 들어가면서 억지로 행동해야 했던, 행복하지 않은 심경을 내보인 것 아닐까?
화자는 맞지 않는 현실의 적응을 위해 가족들, 급우들, 교사 등 타인들에게 본심을 속이는 연기를 강화하고 연기로 살아간다.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고 실실 웃게 만드는 장난꾸러기다. 그러나 절대로 개구쟁이가 아닌 ‘필사적인 서비스’의 삶인 것이다.
하녀와 머슴의 추악(?)한 범죄도 ‘힘없이 웃으며’ 참고 만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순경도 정부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화자는 세상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포함되려고 무던히 애쓴다. 체조시간에도 계획적인 실수를 저질러 모두 배를 쥐고 웃게 만든 화자가 고소를 짓는 순간, 한 친구가 나지막히 속삭인다. “일부러, 일부러..” 화자의 위장술을 간파한 친구의 시선에 갇히게 된 그날부터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되면서 그 친구의 환심을 사기위해 노심초사하며 스스로 지배당한다.
또한, 화자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속으로는 경멸하면서) 끊임없이 그의 인생에 개입하여 영향을 끼치는데도 마지막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호리키를 보자.
그는 ‘술과 담배와 매춘부와 전당포 그리고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교활하고 처세에 능하다. 작품의 전면에 걸쳐 화자에게 부정적 영향력으로 작동하는 인물이 ‘좌익사상가’임을 묘사함으로써 작가의 마르크스주의 활동경험에 대한 갈등을 묘사하는 것 아닐까?
동의하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니는 창백하고 나약한 지식인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슬며시 기분이 나빠진다. 꼭 이렇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참여하고 보니 ‘알고 보니 어떻더라.’는 식의 ‘뒷북치는’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 나약한 지식인은 비겁하게도 자신보다 더 나약해 보이는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나 미치광이로’ 보이는 매춘부들과 ‘그 품속에서 푹 빠지는’ 생활에 젖기도 하고 한 여성과 동반자살을 시도하기도 하며 흐느적거린다. ‘잘 속아주는’ 여성들은 자신의 연기대상으로 훨씬 편했던 것 같고 당연히 여성편력이 이어진다. 마치 이상의 [날개]에서 보여 지는 무기력한 남성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도대체 화자는 인간의 허위를 냉소하고 동화하지 못하면서, 허위적이지 않은 삶을 살기위해 무슨 노력을 했는지? 기껏해야 속으로는 냉소하며 겉으로는 웃어주는 연기로 사람을 대하고 한껏 착한사람 으로 행세하면서 여성의 ‘등이나 쳐 먹는’ 무능력한 존재일 뿐이다. 화자의 눈에 비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허위로 가득 차있는 세상’에 대해 항의라도 해야지 왜 자청해 당해주고 비위맞춰 놓고서 못하겠다고 엄살 부리는가? 정말이지 착한 척 하는 사람, 그야말로 위선자는 화자(작가) 아닌가?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도 않고서 자신을 피해자인양 하는 사람들 재미없다.
물론 행복의 기준은 개인에 따라 다양할 수 있고 작가는 정말 고뇌한 것 같다. 상대방의 발목 잘린 것보다 칼끝에 스친 내 손가락이 더 아픈 법이고, 배고픈 것보다 정신적 공황이 더 힘겨울 수 있다. 가엾고 불행한 사람! 이래서 많은 여성들이 연민했는지?
다 읽은 느낌 별로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공황상태에 빠진 일본젊은이들의 의식반영’2) 이라는 지점으로 이해할 수 는 있지만 작가의 삶과 겹쳐지니 어둡고 칙칙하다.
그러나 나의 반응과 상관없이 이 작품은 꽤 유명하고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 같다.
여전히, 작품을 분석하는 나의 역량부재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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