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감상
소통되지 않는 것에 대한 간절함
발달장애로 11살이 되었는데도 말을 못하는 조카가 있다. 아이엄마는 병원을 전전하며 애쓰다가 지금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신앙심으로 버티는 것 같다. 식구들이 모일 때면 조카 녀석은 한쪽 구석에서 종이나 두루마리 휴지만 끝없이 잘게 찢으며 혼자 놀다가 때때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뭔가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나는 가끔 ‘고모’하며 달려오는 그 애의 언어를 꿈속에서 듣는다. 그 아이의 입을 통해서 속 시원히 나와 주었으면 싶은 언어에 대한 갈증을 이 책을 보면서도 느꼈다. ‘아이드비크 드 엘’ 목이 타는 언어의 갈증.
엄혹했던 군부독재시절 ‘타는 목마름으로, 신 새벽 뒷골목에서’ 숨죽여 외친 언어, ‘민주주의 만세!’를 그때의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해 숨이 턱턱 막히도록 절박하면서도 내뱉지 못했던 언어들.. 콜브륀의 남편 죈느가 우여곡절 끝에 쟁취하게 되는 한마디 해방선언처럼 넘어지고 깨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외쳐야만 하는 것, 반드시 말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곧 생존이기에.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은 채, 적절히 기회주의적이고 적절히 인기발언만 하면서 정작 소리쳐야할 많은 부당한 것들에 대해 방임하고 있지 않은가.
파스칼 키냐르는 언어학자집안 출신의 어머니와 음악가인 아버지 사이에서 여러 언어를 습득했고 여러 음악을 익히면서 자랐다고 했다. 음악 또한 악기를 통한 소통, 즉 언어의 다른 방식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각국의 다양한 언어들로 인한 혼란으로 언어습득을 거부하는 등 자폐증상을 앓았다고 한다. (본 책 뒤의 해설참조)
언어의 범람 속에서 언어를 거부하였던 그가 쓴 첫 작품이 [말 더듬는 존재]였고 이 작품의 이야기 전개도 ‘말더듬이 왕 루이의 죽음 후 카를로망이 왕위에 오른 후’로 전개하는 것이 의미심장해 보인다. 작품에서 콜브륀이 재봉사 죈느에게 반하여 사랑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것도 하필이면 왜 벨트였을까? 흘러내리지 않게 조이는 것, 즉 속박 또는 집착의 욕망은 벨트를 통한 사랑의 징검다리 쌓기로 나타나고 ‘영주’라는 임시방편적 해결과 동시에 긴 고통을 안고 오지만 원죄처럼 망각하지 않아야 할 이름을 잊어버린 콜브륀의 고통은 죈느가 해결한다. 그런데 이 구도는 또 뭐지? 아내의 (가족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남편의 노력인가? 아니면 상투적 드라마처럼 여성은 늘 자신의 문제를 남성을 통해 극복하는 식의 여성관을 이 작가도 지니고 있는 것인가? ‘피해자는 자기의 언어를 가지지 못한다.’ 라고 누군가 말했다던가? 그런데 파스칼은 왜 하필 죈느를 통해 이름을 기억하게 했을까? 이 작품을 통해 언어를 창조하는 작가가 경험하고 사유한 언어적 의미와 고통스런 창작의 갈증을 독자도 전류처럼 전달받게 된다. 하지만 왜 그가 갈망했던 언어의 형상이 이름이었을까?
그것도 그들의 삶을 좌우할 키를 지닌 기득권자의 이름을..
하나의 상상은 ‘루이 2세후 카를로망이 지배했다’는 시대적 배경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당시는 농촌이나 항구 어디에도 글을 쓸 줄 아는 이가 없었고’ ‘매일 매 분이 세상의 종말이기 때문’인 혼란스러운 때였던 만큼 봉건권력을 상징하는 영주를 극복해야 자유로워지는 시대였다. 그런데 이름을 잊어버린 것이다. 즉 기억해야 할 이름을 망각하고 일상의 나태함과 무관심에 지배당할 때 어느새 속박의 굴레가 덮친다는 것.
또한, 이름은 존재를 규정한다. 5공 청문회 때 어떤 국회의원이 전두환을 향해 ‘살인마!’ 라고 외쳤을 때 티브이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입속으로 복창했고 찌르르 공감이 형성되었다. 때로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비로소 내게 와서 꽃이 되는’ 이름도 있을 것이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어두운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 이름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의 영주의 이름은 죈느와 콜브륀으로 상징되는 민중들에게는 두려운 이름이 아니었을까? 영주는 콜브륀이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언어의 역할은 무엇일까? 소통? 관계?..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면 언어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언어는 사회적인 관계의 망을 형성하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관계의 고리다. 죈느의 가족들이 소박하게 살다 남긴 것들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내 목소리’를 남기고 갔기에 역사가 되듯.
때때로 언어는 공허하다. 생각과 달리 빗나가고 가슴속에는 가득한데 정작 표현되어 나오는 것은 한 줌 조각밖에 안 되는 경우도 많다. 한 마디도 말하지 않으면서도 수많은 내용을 전달하는 사람도 있고 반지르르한 달변으로 감칠 듯 많은 말을 하는데도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양날의 칼’처럼 내뱉는 순간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언어, 세치 혀끝으로 내뱉는 언어가 아닌 가슴속 진심을 되새김하여 세상과 악수하는 언어가 얼마나 될까. ‘20세기는 언어전쟁의 시대’ 라고 하고 대선이 끝나는 순간, 대통령의 측근인 인수위원장은 ‘오렌지를 오륀지로 발음해야 한다.’며 ‘영어몰입교육’을 선언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짧은 레포트에 담아내는 많지 않은 언어에도 씨름하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숨이 가빴다. 아무리 소리쳐도 불러지지 않는 꿈속의 이름처럼, 또는 목구멍에 간질간질 걸린 채 나오지 못하는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그러나 소통되지 않는 것의 답답함과 말해야 하는 것의 간절함이 드디어 내 목을 뚫고 나왔다. 아이드비크 드 엘!!
책을 덮는다. 표지를 장식한 여인의 붉은 혀끝이 말려있다. 그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오늘 나는 또 누구에게, 무슨 언어로 다가갈지 새삼, 엄숙해지는 순간이다.
2008년 봄
'강의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0) | 2009.03.14 |
---|---|
최순덕 성령충만기 (0) | 2009.03.14 |
'수입 신부들' (0) | 2009.03.14 |
인간실격 (0) | 2009.03.14 |
"억울하면 밥사라?" (0) | 2009.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