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덕방] [마지막 테우리] [마른 꽃]에 대한 감상
그윽한 ‘마른 꽃’들의 자존심
93세로 수(壽)를 다하신 나의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참 깔끔한 분이었다. 평소 바지런 바지런 뭐든 소일거리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고 90이 넘도록 속옷은 손수 빨던 분이었다. 돌아가시기 보름 전쯤에는 기동을 못하시게 되면서 먼저 가버린 아들보다 더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칠순의 며느리에게 대소변을 내놓는 걸 몹시 불편해하셨다. 나는 그때 차라리 할머니께서 정신도 놓아버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자존심이 상처받지 않으시도록.
[마른 꽃]의 ‘나’는 매사 경우 바르고 또 참으로 여성스럽기도 했던 할머니를 회상하게 했다. ‘나이같은 건 잊어버린 채 스무 살의 청춘들처럼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밤공기를 염려해 걸쳐주는 그의 코트 안에 몸을 옹숭’거리게 되는 여인의 모습도 그렇다. 이 총명하고 깔끔한 여인은 ‘나’의 딸과 ‘그’의 며느리가 두 사람의 로맨스를 알게 되고 사회적 틀로 결합시키려 추진하게 되자 그와 결별한다. ‘젊은 시절의 연애는 정열을 넘어 정욕이 있었고 그래서 앞뒤 상황을 살피고 따지고 할 겨를이 없었지만’ 육십이 넘어 ‘정욕이 눈을 가리지 않으니’ 모든 것이 너무 빤히 보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생활을 같이 할 때 나타날 온갖 잡다한 인간의 속성들..그리고 깨닫는다. 그런 것들을 견디기 위해서는 사랑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아이 만들고 낳아 기르고 짐승 같은 시간들을 같이 한 사이여야 가능하다고, 겉멋부리는 사랑에 비해 정욕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아콰마린 이라는 청남색의 보석을 등장시켜 상큼하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할머니 박완서에 갈채를 보낸다.[나목] [그해 겨울..][그 많던 싱아..]등 박완서의 작품들은 읽는 맛이 개운하다. 사람의 밑바닥 감추고 싶은 허위의식을 드러내어 읽을 때마다 그 속의 내 모습을 보며 부끄럽게도 하는 작가이다. 이 작품에서도 조카며느리들의 얄팍한 행태들이 잘 보인다. 아직 젊은 딸과 며느리가 두 사람의 사랑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호들갑을 떠는 것도 젊은이들의 기준이기도 하겠지만 자신들의 ‘불편한 짐’ 을 덜고 싶은 계산이기도 하리라. 사람들은 왜 그리 형식의 틀에 묶어야 완성이라고 생각하는지..
‘정욕은 없는’ ‘마른 꽃’ 일지라도 가만히 두면 그대로 아름다운 향기를 지니지 않는가. ‘마른 꽃’도 자존심이 있다.
안 초시도 한때는 목에 힘깨나 두고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경테도 바꿀 형편이 못되어 딸 눈치를 보아야 하고 서 참의의 복덕방에서 잠도 얻어 자고 술잔도 얻어먹어야 하는 삶에 자존심이 상한다.
서 참의는 한때는 무관으로 ‘한번 호령하면 산천이라도 물러설 것 같은’ 기개도 있었건만 이제는 ‘기생, 갈보 따위가 사글세방 한 칸을 얻어 달래도 녜-녜 -하고 따라나서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프다 그러나 안 초시의 꼴을 보거나, 자기보다 뛰어났던 김 참의가 “가마니나 신문잡지 팔거-쇼-”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며 자신이 다행스럽고 위안이 된다. 별로 성미가 맞지 않아 투덕거리는 두 사람 사이를, 대서업도 하며 사전을 끼고 와서 ‘삼국지 읽듯’ 하는 박희완영감이 적절히 조절하고 매개한다. 그렇게 세 사람은 미운 정 고운 정 들이며 복덕방을 중심으로 콩닥콩닥 살아간다.
그러나 호주머니 형편은 열악하고 자존심은 강한 안 초시가 호시탐탐 재기의 기회를 찾으려는 것에서도 대충 딸에게 빌붙어 살지 않으려는 노인의 자존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기를 당하게 되자 그렇지 않아도 늘 눈칫밥에 가시방석 같았던 딸을 볼 염치가 없어진, 이 자존심강한 노인은 살아갈 힘이 없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모두 부동산중개소라 부르지만 70-80년 까지만 해도 복덕방이라 불리던 부동산 중개업소는 예전엔 노인들이 모여서 화투나 바둑 장기판 놓고 종일 잡담 나누다 손님 오면 거들곤 하는 곳이다. 작품속의 안 초시처럼 노여움타서 삐치는 사람이 반드시 있고 소주 한 병 사놓고 데리러 가면 못이기는 척 나갔다가 또 삐치기도 하며 투덕투덕 정을 이어가던 어른들의 사교장이요 사랑방 이었다.
이 작품은 70년 전이 배경이라 허드렛물 버린 수채를 통해 옆집에서 무슨 음식을 해먹었는지도 알 수 있었던 시대다. 어릴 적 시골집 마당의 수채에 설거지물 버리면 닭들이 와서 남은 음식찌꺼기를 쪼아 먹던 풍경도 선하게 드러난다. 세 노인들의 개성과 미묘한 기 싸움들도 들여다보듯 선명하고 평소에는 투덕거려도 정말 어려울 때 함께하고 마음을 모으는 우리 옛사람들의 공동체적 인간미가 콧등을 찡하게 한다. 안 초시의 장례식장을 뒤로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고 내려가는 두 노인의 모습이 허허롭게 여운을 남기고 끝내 못 바꾸고 세상을 떠난 안 초시의 안경테가 안타깝다.
[마지막 테우리]는 마치 풍경화를 보듯 애틋하고도 아득한 느낌을 주었다. 고즈넉한 초원에서 풀을 뜯는 소들 사이에 서있는 자그마한 한 노인이 액자 속에 담긴 듯하다. 노인은 제주 4.3항쟁이 남긴 상처를 고스란히 지니고 산다. ‘사태’ 이후 그는 행복도 인간도 믿지 않게 되었고 그 때 이미 죽은 그의 현재는 그저 ‘가공의 삶’일 뿐이다.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에 반대하여 투표를 거부한 주민들의 의지는 무참한 학살로 돌아왔다. 이백여 마을이 소각되고 무수히 죽어간 사람들과 함께 마소들도 죽어갔다. 그 처절하게 초토화된 땅, 7년이나 방치되었던 초원에서 그는 테우리가 된 것이다. 하늬바람이 불어 땅속이 말라가고 밤공기가 차가워지는 밤, ‘잔등에 흰서리를 인’ 소들이 불안한 발굽을 울리면 노인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자식 같은 존재인’ 소들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 도둑에게 끌려간 소를 찾기 위해 뒤쫓다가 다수의 도둑을 상대로 기지를 발휘하여 되찾아오는 노인의 연륜과 지혜는 무릎을 치게 한다. 어두운 시대의 상처로 얽혀있는 청년을 볼 때 마다 가슴속 죄책감에 고통스럽지만 사진 찍기를 좋아하여 노인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 청년에게 소 예기를 할 때는 신이 나고 모르는 것이 없는 노인의 모습은 어머니가 평생토록 애지중지 자식 돌보듯 한 깊은 애착을 보여준다. 강풍이 불던 어느 날, 소들도 사라지고 ‘검은 구름에 해도 침범’ 된 밤 , 소를 잃고 찾아 헤매다 길을 잃은 노인은 마른소똥으로 불을 피워 지새우던 중 “어이, 순만이” 라며 자신을 부르는 테우리 친구 현태문의 음성을 듣는다. 그 소리에 의해 소 발자국들을 찾아내게 되고 마을을 찾게 되지만 현태문은 마지막 임종이었다.
수많은 살상과 개인적으로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초원을 떠나지 못하는 노인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제주 4.3항쟁의 한과 분노를 생생히 드러낸다.
갈아엎어지는 초원도, 현태문의 죽음을 예감하듯 숲을 내려간 소들도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 깊은 한 같은 것.
그리고 소를 돌보고 지키며 수백 마리의 소떼들이 풀을 뜯던 초원이 포크레인에 갈아엎어져 ‘생피를 벌겋게 드러낸’ 마지막 순간까지도 테우리로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킨다.
이렇듯 세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 자신의 고귀한 존재를 지키려 한다. 자신의 젊은 시절 상처를 푸른 초원에서 소들과 함께하며 소를 통해 자신을 살려나가는 테우리 노인도, ’나이가 들수록 단정하고 깊어지는 시선으로 자신을 보듬는 ‘나’의 모습도, 더 이상 추해지지 않기 위해 자살을 택한 안 초시도,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당하는 것을 못견뎌한 자존심강한 사람들이다.
늙는다는 것은 몸의 작동은 쇠퇴하겠지만 정신이 쇠퇴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묵은 김치처럼 깊고 그윽한 지혜와, 작은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넉넉한 연륜으로 빛나는 그 무엇을 지니는 것 아닐까.
2008년 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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