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순덕 성령충만기> -이 기호


              정상성(?)에 대한  비틀기          


 ‘어미배속에서부터 하나님의 규례대로 흠 없이 자란 순덕은 성경대로 글자를 배우고 회당을 놀이터로 하여 ’성령‘을 키운다. 더구나 아비는 교회버스를 운전하고 어미는 사찰집사를 맡았으니 집안이 통째로 성령덩어리이다. 어린순덕이 어미에게 “착한 일을 한 사람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는지, 세종대왕도 이순신도 지옥으로 갔는지?”를 질문하는 장면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나도 어릴 때 꼭 그와 같은 질문을 했었다. 그러나 순덕의 어머니는 “그러하다. 믿음 없는 자는 다 유황지옥에 떨어질 것이다”고 답했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은 같은 질문에서 ’아니다‘고 답했기에 나는 성령이 없는 자임이 확실하다.

여하튼 순덕어미의 단언은 순덕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순덕은 유황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내면가득 지배하게 되고 기도에만 애쓴다. 그녀의 생활은 통째로 기도와 전도의 삶이다. 순덕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염려하는 담임선생님께 순덕의 어미는 한술 더 떠 교회주보를 내밀며 전도하는 것으로 상담을 끝내는 정도다.

 어느 날 순덕은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가 ‘하나님의 따로 쓰심’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쓰일’ 자리를 찾던 중 아담의 변태적 행위를 목격하게 되었으며 그의 ‘죄’를 자신의 전도를 통해 회개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쓰임’이라고 해석한다. 이윽고 ‘구원’작전에 돌입하여 스토커처럼 아담에 집착하던 그녀는 드디어 아담을 교회로 이끌게 되고 아내와 가족을 두고 온 아담과의 동거를 시작한다. 쓰임을 완수한 그녀의 행복한 간증은 매번 교인들을 감동시키고 아담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아멘, 아멘 화답한다.


 순덕은 기독교적 구원과 영생에 매몰되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교회라는 견고한 울타리에 자신을 가둔다. 반전도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 순덕의 비정상적 안주보다는 차라리 아담의 귀의가 현실적이다.

이 짧은 비정상(?)적인 소설, 마치 구약성경을 풀어놓은 듯한 ‘이 작품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하나, 비정상성에 의한 정상성 조롱하기다.

 순덕은 ‘자신의 본업은 하나님 사업이니 지상에서의 학과는 그 무엇이든지 상관없다’ ‘지상의 잣대로 판단치 말 것’을 주장하기도 하고 순덕의 어미는 순덕을 걱정하는 담임선생에게 도리어 전도지를 내미는 등이 그렇다. 또한 일하던 커피숍에서는 주인만 없으면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틀어 쫓겨나기도 하면서 그녀는 오히려 타인들을 안타까워한다. 쫓겨나거나 세상의 몰이해(?)를 겪으며 자신을 박해받는 순교자정도로 여기는 듯도 하다.

또한 작가는 순덕이 찾아 헤매던 ‘쓸모’의 실천대상을 하필이면 도둑도 사기꾼도 아닌 변태남자 아담으로 설정한다. 아담이란 이름은 창세기에 최초의 인간형상으로 등장하여 이브를 위해 금단의 열매를 제공한 원죄를 지닌 인물 아닌가? 그 이름을 지니고 이기호의 소설에 등장한 아담은 ‘비정상’의 일탈적 행위자로써 ‘정상’의 시각에서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지만 아담은 자신의 벗은 몸으로 순덕을 막아서는 당당함을 보일뿐 아니라 오히려 ‘정상’이었을 때 ‘대로변 밝은 네온사인에 비친 아담의 얼굴’은 더 허약하고 외소’하게 묘사된다.


둘, 유황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인간이 지니는 두려움의 실체에 대한 조롱이다. 순덕의 구원에 대한 집착은 ‘죽어서 유황지옥에 떨어질 수 없다’는 두려움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 두려움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 의해 각인된 의식으로 자리한다. 문득 궁금해져서 네이버지식, 유황지옥을 검색해보았다.

사전이 아닌 누군가의 블로그에 이렇게 정의되어 있었다.


‘유황지옥은 불 못 보다 더 뜨거운 고통의 장소입니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아이들에게 이런 식의 두려움을 심으면서 종교를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덕의 어머니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인물로서 모든 가치를 교회 안에 두며 벗어날 수 없는 두려움을 조장한다. 그러나 그 실체가 무엇인가? 작가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주입되어 형성되어 있는 사물에 대한 인식이나 가치들이 어쩌면 많은 측면, 허상에 의해 조장되고 체질화되어 있음을 교묘히 비틀고 있는 것 아닐까?

부자동네든 가난한동네든 어느 곳을 가도 수많은 교회들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안에서 수많은 가치기준들이 만들어지고 전파되어간다.  무엇이든 못 만들 것이 없다. 두려움이든, 평화든..  

기발한 소설이다. 소설 같지 않은 소설. 그야말로 이런 것도 소설이 되는구나. 참 별거 아니네 싶으면서도 번득이는 해학의 유쾌함을 선사한다. 특이한 점은 대개 종교적 모티브를 가지고 시작하는 소설들은 죄, 업보, 죽음 등 어둡고 우울한 인간의 내면을 그리거나 밝고 경쾌하여 희망을 주는 권선징악의 요소를 담은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비해 이 소설은 절망도 희망도 아니면서 불쾌하거나 딱히 경쾌하지도 않은 여운을 남긴다.

종교를 가지지 않고라도 교회 한번쯤은 다 가보았을 테고 성경 한번쯤은 읽어보았을 독자들로 하여금 폭소를 자아내게도 하고 한편으로는 교묘히 비틀어 조롱 하는듯하여 약간은 당혹감한 느끼게도 하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려’ 애쓰는 순덕의 ‘성령 충만함’을 이리 비트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또한 작가는 기독교인일까?  궁금한 대목이다.


사족 몇 마디 - 내게 있어 글을 읽는 맛은 역시 소설이다.

줄거리가 있고 맥락이 있고 삶의 진정성이 뚝뚝 묻어나는 (시도 진정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 쪽이 맛이 있다.

그러나 중간고사가 끝나면서 시작될 수업이 소설로 진입하는 순간 행복해지는 기분에 불쑥 발표까지 맡고 보니 걱정이 적지 않았다. 발표와 상관없이 읽었을 때 참 재미있었던 글이 발표를 전제하고 읽으려니 부담으로 걸린다. 분석적 글 읽기를 시도해도 어차피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리라. 지난시간 한 친구가 제기했던‘대중성’ 이라는 것도 그런 것 아닐까 ‘대중의 정도’에 따라 독자는 구별되는 것이고 다양한 정도의 대중들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도 달라지는 것일 게다. 그런 측면에서 걸쭉한 언어로 걸쭉하게 세상을 향해 비아냥거리는([버니]라는 작품을 봐도) 이 기호라는 젊은 작가의  글쓰기는 누구를 향한 것일까?

2008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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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