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냇물아> <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 <슬픈 미나마타> 에 대한 감상.
생명의 숨결에 귀 기울이기
어린 시절 고향마을은 아침 해가 뜨면 노란 호박꽃과 순백의 박꽃이 별처럼 빛나던 산언덕 아래로 ‘빈지수’ 또는 ‘미리내’로 불렸던 강줄기를 따라 ‘냇물이 달리고’ 있었다. 여름밤이면 그 강에서 ‘가설극장’이 열렸고 강 아래위를 나누어 하루의 땀을 씻은 처녀총각들이 가설극장의 천막 앞으로 모여들었다 . ‘두견새 우는 사연’ ‘새벽길’ 등의 영화 포스터는 윤정희와 남정임 문희의 예쁜 얼굴을 신성일, 박노식 같은 잘생긴 배우들이 감싸고 있었다. 하늘엔 온갖 별자리들이 제 자리를 드러내며 반짝이고 반딧불이도 덩달아 춤을 추고 다녔다. 갈고 다듬으면 형형색색의 반찬이 되고 오곡밥도 되고 울타리도 되어 소꿉놀이를 풍성하게 했던 고운 자갈들. 곱돌을 주워 반반한 흙바닥에 줄을 그어 땅따먹기하며 놀게 해주던 강.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은어는 대낮의 별이 되어 강물위에서 반짝거렸고 모래무지와 꺽다리도 지천이었다. 방아깨비 두 마리를 머리 맞대어 콩닥콩닥 방아를 찧게 하고 수확이 끝난 논바닥에 하릴없이 툭툭 튀어 나오던 메뚜기는 어제만난 친구 같았다.
어느 해, 박정희의 ‘새마을’에 동원되어 노란 볏집을 이고 있던 지붕이 회색의 슬레이트로 바뀌고 윗동네에 기와공장이 들어오던 언젠가부터 강가에 찐득찐득한 검은흙이 쌓였고 젊은이들을 도시로 밀어 올렸다. 도시의 팍팍한 ‘공순이’가 힘겨워 고향을 찾을 때마다 고향의 산과 들은 조금씩 색깔을 잃어가더니 어느 새 강가는 수초로 뒤덮이고 고운 자갈은 근본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소꼽놀던 각시방도 신랑방도 사라지고 비오면 잠기던 돌다리는 자동차바퀴가 굴러가는 시멘트로 견고해진 강가에 앉고 보니 허전하고 아쉬워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거위라,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전에는 더러 보였는데 요샌 통 안이네.” 새까맣게 그을린 노인네가 혼잣말처럼 답했다. 그 눈동자가 듣고 보니 중요하고 재미있는 풍경을 하나 잃어버렸다“는 듯이 비어있었다...그의 텅 비어있는 눈동자 속에 ’거위가 보이던 세월‘이 뭉청 빠져버린 것’
이라고 썼던 최성각의 거위를 잃어버린 풍경에 대한 묘사가 나의 오랜 동심을 송두리째 끌어내었다. ‘텅비어버린’ 그의 눈동자처럼 은어떼가 반짝이던 세월이 ‘뭉청’ 빠져버린 허전함이 되살아나서 나도 ‘노인’처럼 심장에 뻥 구멍이 뚫리는 듯 허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허전함은‘내장 한 토막을 해부실에 남겨두고 화장터로 간’미나마타 마을의 ‘인간시계’ 센스케 노인의 쓸쓸한 죽음과도 이어진다.
그뿐인가,
“요즘 제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제비라고요? 서울 강남의 제비족을 말하는 게 아니라면, 흥부와 친했다 놀부에게 똥물먹인 그 제비요? 그러고 보니 요즘 많이 날라 다녀야 하는데, 통 보이지가 않네요. 언젠가 참새가 삼분의 일로 줄었다는 보도가 나오더니.... 다 환경변화 때문이겠죠?
라는 박병상의 글에서 해학적 슬픔으로 치밀어 오른다.
더구나 근래에는 강원도 경상도 심지어 서울 도심에까지 멧돼지가 출현한다. ‘불가피하게’ 총을 쏠 수밖에 없었다는 경찰의 발아래 처참하게 널부르져 있는 멧돼지의 사진이 화면을 채운다. 아나운서는 전문가를 연결하여 원인을 분석하고 한결같이 답변은 ‘서식처를 잃은 멧돼지가 먹이를 찾아 헤메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조치’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 와 <달려라 냇물아> 만 읽었다면, 이 글들에서 간곡하고도 따스한 언어로 들려주는 거위의 말을, 배추흰나비의 몸짓을, 짱뚱이의 하소를 귀담아 들었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 에서는 2007년부터 ‘고산준령이 그리운’ 그러나 고산준령으로 갈 길이 끊어진 멧돼지가 ‘자연의 재앙’(최성각) 인 인간의 도시에 출현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을 적고 있다. 이 책들을 읽은 후 ‘환경운동 하는 사람을 공산주의’ 보듯 하지는 않지만 환경문제에 무지한 나에게도 “흰둥아, 내 니똥을 군말 없이 치워 줄 테니 경찰아저씨들 눈에 띄지 말거래이. 띄면 죽는 수가 있단다.”며 흰둥이의 미래를 걱정했으나, 결국 마취 총에 죽은 ‘흰둥이의 짧고도 고독했던 일생’을 애도한 최성각의 심정이 찡하게 전해져온다.
언젠가 경제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ppt를 사용하여 그림 하나를 보여주셨다. ‘오래 된 미래’가 출간되기 전의 티베트 같은 곳에서 저녁놀이 물드는 고요한 언덕길을 젊은 아낙이 물동이를 이고 걷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몇 학생에게 질문하셨다.“이 그림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 “평화로와 보인다.” “쓸쓸해 보인다.”등의 답변이었던가? 교수님은 대개 그렇게 답한다면서, 그런데 “평화로운 풍경의 이 삶을, 이 여성이 선택했을까요?”
경제학이나 수학 통계 등을 워낙 싫어하는 나로서는 그 수업이 뭘 설명하려고 한 것인지 맥락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 장면은 또렷이 남는다. 그 여성의 모습은 우리의 60-70년대 농촌에서 일상으로 볼 수 있던 풍경이었다. 질문도 남았다. 그 시절 과연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삶을 불행해했던가? 그리고 지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풍요(?)해져서 물동이를 이고 다닐 이유는 없지만 고운 저녁놀을 볼 여유도 없어진 시대에 행복한가?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었던가?
내가 읽은 세권의 책들은 “아니라” 고 답한다. 경제성장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밥 굶는 일도 없어졌고, 물동이를 이지 않아도 되고 강가의 얼음을 깨며 시린 손으로 손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솔직히 그립긴 하지만 그 배고픈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데.
청년시절 공장의 굴뚝과 최루가스가 뒤덮던 도시의 골목을 헤매며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거제도에 내려갔다가 아예 둥지를 틀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사유들로 몇 년 전 다시 수도권으로 올라오고 보니 즉각 나타난 것이 알레르기였다. 발작적인 알러지 증상으로 병원을 들락거리게 된 것이다. 기본체력이 튼튼하고 흡연으로 단련(?)되어서인지 남편은 괜찮은데 아이와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고생이다. 두 번째로는 너무 바빠졌다. 도무지 여유롭지가 않은 것이다. 약속이 생겨 시내 한번 나갔다 오려면 몇 번을 갈아타는 번거로움과 더불어 길에서만 꼬박 3~4시간이 걸린다. 이러니 바쁘고 피곤할 밖에.
세 번째는 경제적으로도 더 쪼들린다는 것이다. 우선 거제는 집값이 훨씬 저렴하다. 그런데 작지만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멀쩡한 집을 팔고 왔는데도 수도권변두리의 연립주택 전세도 안 나오는 것이다.
몸은 나빠지고 시간은 조이고 경제는 쪼들리는, 이것이 도시서민의 삶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어 살면서 동네골목까지 잠식해 들어오는 대기업슈퍼마켓의 엄청난 상품을 소비하며‘미친 듯’살고 있다. 무엇을 위해서?
결국 행복하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거대한 시스템에 동화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밀려날까 두렵기에 컨베이어벨트의 나사를 조이며 기계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 찰리 채플린처럼 그렇게 허덕거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자본의 이윤 시스템 유지를 위한 발판이 되어있는 것, 내가 주도하여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주도에 의한 기계화 된 삶. 그렇게 우리시대의 사람들은 이미 자연이 아니라 기계화 되어있는 것 아닐까? 기계처럼 마음은 강팍해지고 배는 부른데 마음은 자꾸 공허해진다. 도시가 보이는 도봉산정상에 올라보면 내려다보이는 그 많은 아파트에 내 공간하나 없으니, 분양정보에 매달리고 간당거리는 비정규직의 삶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무엇으로 행복해질까?
<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에서 박병상은 뻐꾸기 소리를 들어보라고 한다.
‘작지만 가장 멀리 나는’ 도요새를 바라보라고 한다. ‘가여운 직박구리’의 고단하게 자리한 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먼 길을 돌아서 걸어가 보라고도 귀띔한다. 정말 뻐꾸기 소리를 들어 본 게 언제였는지.. 안타깝게도“도요새, 도요새, 그 몸은 비록 작지만 도요새 도요새 가장높이 나는 새”라는 노래를 멋들어지게 잘 부르는 지인의 노래를 통해서나 그려 본 도요새는 점점 보기 어려워진다 한다.
뻐꾸기와 도요새와 거위와 배추흰나비들이 사라져 버리는 세상일 때 인간의 모습이 어찌될지를 <슬픈 미나마타>의 이시무레 미치코는 ‘유리’처럼 된다고 증명해 보인다.
“나무에도 풀 한 포기에도 영혼은 있다고 나는 믿어요. 물고기에게도 지렁이에게도 영혼은 있다고 믿는데, 우리 유리한테는 그것이 없다니, 그게 말이 돼요?”
“시집와서 3년도 안돼 이런 희귀병에 걸리고 말았으니 애석타. 나 혼자서는 단추도 못 채워. 손도 몸도 이렇게 쉴 새 없이 떨리니. 머리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혼자 제 멋대로 떨린다니까.”
건강한 몸으로 바다를 좋아하며 소박하게 살았는데 공업자본의 비열한 이윤추구의 희생이 되어 슬프게 죽어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성장에 눈이 멀어 자연에 해악을 끼친다면 우리 모두‘슬픈 유키’가 될 수 있음을 예고한다. 보라 당장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신종질병들로 온 세상이 호들갑을 떨고 멀쩡한 인간의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지 않는가. 미나마타시의 총체적 살인현상을 담담하고도 나긋나긋한 언어로 증언하고 있는 이시무레 미치코의 서늘한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는다면, 수많은‘유리’와‘센스케노인’‘유키’들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최성각의 <길을 잃은 토건국가> 편에서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마르코스 부사령관과 인디오인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길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에는 뒤쪽을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될 거다...그것은 전에 어디에 있었는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기 위해서라네.”
가을의 끝자락에서 참 아름다운 글들을 읽었다.
이 책들은 그 어떤 주장이나 구호보다 잔잔히 스며들었다. 사람의 이런저런 허물이나 양태가 아니라 자연과 생명에 대한 존중과 가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생명의 문제, 사람과 자연이 공존해야하는 환경의 문제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부터 과목을 편성하고 교육하여야 한다. 이런 책들을 읽고 토론하며 자란다면 아이들이 사람에게도 사물에게도 따뜻한 눈길을 나누고 오롯이 귀를 열어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귀를 기울여 가만히 들어보면 시내의 아스팔트를 방황하는 멧돼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신종플루니 조류독감이니 광우병이니 지구온난화니 하는 인류의 재앙조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들을 수 있을 것이고 해법을 위한 실천도 커질 것이다. 더불어 미나마타 마을의 ‘시계’였던 단정한 센스케노인이 “싹둑 잘려진 자신의 내장토막을 해부실에 남겨두고 화장터로 끌려가는 죽음”을 우리가 뒤따르는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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