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나는 ‘주경야독’을 실천하는 노동자이면서 야학학생이었다.

지금은 고급학원이 몰려있는 부자동네가 된 곳, 그때는 뚝방을 끼고 판자촌이 밀집해있던 신정동과 목동의 ‘쪽박산’ 빈터에 대형천막을 치고 책상과 의자를 만들고 칠판하나 걸어놓은 교실에서 대학생들이 중등과정을 가르쳤다.

그들의 두툼한 책과 지성은 부러움이었고 비슷한 나이들(때론 더 적은 경우도)이었음에도 우리는 ‘어린’ 중학생이 되었다. 당시 명문대생이던 대학생 교사들은 사서 고생을 감수하는 헌신을 보여주었고 동년배정도들인데도 어찌 그리 의젓하던지... 언제나 그렇듯 가난한 동네에는 분란도 많았고 늘 부모들의 싸움과 주정, 폭력에 피폐해진 청소년들은 그래도 공부해보겠다고 저녁마다 지친 몸을 끌고 그 허허벌판에 모여들었고 알파벳을 외우고 시를 낭독하며 위로받고 꿈도 품었다.

그러나 시작할 때 60여명이던 야학생들은 그마저 계속 다닐 형편이 못되어 겨우 열두 명이 졸업했고 이어 2~3기까지 지속하다 이런저런 내외부적 환경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이미 저만치 달려가 있는 사람들을 아득히 먼 거리에 둔 우리들의 달리기는 시작되었고 강산이 몇 번 바뀐 세월을 건너 조우遭遇했다.


30여년 만인가? 야학학생과 대학생이었던 사람들이 모였다. 선생님들은 30여명, 야학학생들은 연락이 닿지 않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겨우 다섯 명이 참석했다. 모두 머리가 희끗거리는 만큼의 세월이 흘렀기에 이름을 말하고서야 ‘아’ 하고 확인되는 경우도 많았다.

선생님들의 명함은 화려했다. 모 지방 검사장, 변호사, 교수, 대기업임원.. 대충 다 그랬다.

우리는 지니는 명함도 없이, 아파트관리소장, 금형공장 노동자, 택시 운전사였다.

모두 몹시 반가웠지만, 많이 아프고 애틋하기도 했다. 자리를 불편해하는 친구를 보는 안쓰러움과 안타까움, 건널 수 없는 강처럼 아득한 차이, 기득권의 견고한 카르텔의 벽...

계급적 토대의 불평등은, 강산이 몇 번이 바뀌고 정권이 수차례 바뀌고, 목청껏 민주주의를 외쳤어도, 견고히 불평등했다.

이것이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사회의 틀이었다. 나는 입속으로 가만히 외쳤다. ‘틀을 깨야 해, 그래야 우리가 자존의 자유를 지닐 수 있어’

틀 깨기, 두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이 견고한 굴레를 깨고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의 빌리처럼 두 발로 땅을 박차고 하늘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돌아보면 스무 살도 채 되기 전에 노동운동의 전선에서 치열하게 뛰어다녔고 젊음을 온전히 올인 했다. 운동을 시작하는 결단은 ‘당연한’ 것이었고 운동을 그만두는 것은 엄청난 고민과 결단을 필요로 했던 그 시대 운동가의 삶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렇게 세상을 바꾸면 행복한 우리 모두의 미래가 올 거라고 믿었다. 징역살이를 하고 수배생활을 하고 최루탄가루가 범벅이 된 체 길거리를 달리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민주주의는 형성되는 듯하더니 다시 독재가 난무하고 권력이 공포로 국민을 길들이는 사회에서  여전히 시청 앞 잔디밭에 종이캡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허탈함이 밀려왔다.

나는 도대체 뭘 해왔던 것일까? 우리가 ‘타는 목마름으로’ 그리도 외쳤던 민주주의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의 생활, ‘우리’의 관계의 질과 일상이 달라지지 않는,  ‘사치품’처럼 민주주의는 그렇게 허망하고 쓸쓸한 이름으로 내 앞에 섰다.

죽어라 노동하고 죽어라 외쳤는데 성과의 단 열매는 언제나 내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죽어라 노동하고 죽어라 뛰는 방식이 아닌 그 무엇을 바라보아야했다. 그래서 남들이 아이 학원비라도 벌려고 식당 설거지라도 선택하는 동안에 나는 대학공부를 선택했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식의 버둥거림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즉 물질보다는 가치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벌어도 모자랄” 판에 비싼 등록금을 지출하고 사는데도 오히려 나는 풍요로워졌고 먹던 만큼 먹고, 자고, 이상 없다. 생활이 더 나아지거나 나빠지지도 않았다.

결국 삶의 질은 선택의 문제라는 확인을 한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병들게 하는”, 하여 미래가 왔을 때는 죽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황새 쫓는 뱁새’로 평생을 허덕거릴 것이 아니라 룰을 바꾸는 것이 현명하다.


이제는 운동의 방식도 룰 바꾸기로 가야한다.

이를테면 80:20의 사회에서 80의 삶을 보장하는 논의를 넓히는 방식, 20의 것을 나눠달라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20%가 80%의 부를 독식할 수없는 제도를 만드는 것, 죽어라 일해서 자본의 소비유혹광고에 흡인되어 되 바치는 것이 아닌 80%가 주도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상품을 구매할 때 그 공장의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과 복지의 정도를 상품에 기재하게 하여 소비자가 그 정도에 따라 상품을 구매하는 방식(‘오르그 닷’이란 사회적 기업에서 미약하게나마 표기한다고 들었다), 도시와 농촌의 80%가 공유하는 생산과 소비의 공동체 늘리기 등.. 구호가 아닌 구체적인 생활운동이 필요할 것이다.


‘나’와 ‘우리’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 잠시, “빨리빨리” 의 속도를 늦추고 부드러운 운율에 엄청난 혁명적 도발을 담고 있는 존 레논의 ‘이매진’에 가만히 귀기울여보자고.

세상은 ‘꿈꾸는’ 자들에 의해 변화한다.

‘종교가 필요 없고 국경이 없고 소유가 없는 세상,

모든 부가 똑같이 분배되고 군대도 전쟁도 없이 하나 되는’ 세계의 통일,

비록 지금은 ‘몽상’ 같을지라도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꾼다면 그것은 현실이 될 것이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종교의 다름으로 차별받고 마녀사냥을 당하고 종교전쟁으로 죽어갔는가. 또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소유와 지배의 욕망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인간을 욕되게 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제 화폐의 족쇄에 묶인 노예처럼 비굴하거나 비루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를 넘어 화폐가 없는 세상, ‘위에는 하늘뿐’인 권력탈피의 세상, 자본의 무국적화가 의미하는 ‘세계화’ 가 아닌, 공동체적 세계화, 그는 감미로운 음정으로 온 세상을 향해 ‘소리 없는’깃발을 흔든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같이 꿈꾸자고.


50여 년 전 미국의 흑인목사 마틴 루터 킹도 외쳤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도 꿈꾸었다. ‘인간이 권력의 자비에 매달려 사는 사회가 아니라 공적인 생활의 중심에 있게 되는 새로운 사회’ 를..그래서 그는 외쳤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존 레논도, 마틴 루터 킹도, 게바라도 모두 ‘불가능한 꿈’을 꾸었기에 세상은 조금씩 그 꿈에 다가가고 있고, 오늘 또 우리의 꿈으로 남아있다. 일확천금이나 내 가족만 챙기는 이기적 욕망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더불어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공동체적 꿈이었다.


내게도 꿈이 있었다. 어린 날 아침햇살아래 노란 호박꽃과 순백의 박꽃이 별처럼 빛나던 산언덕에서 고운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고, 동네 앞 냇가에서 여름 밤 펼쳐지던 가설극장의 노래 소리는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도회의 삶을 꿈꾸게도 했다.

그러나 어린 날의 소박했던 꿈은 크고 투박한 도시의 불빛들과 빌딩 속에서 잠식되어 버렸고, 내 작은 몸은 노동력이라는 이름의 상품이 되어버렸다. 그물망에 갇힌 물고기처럼, 파닥거릴수록 피로와 상처만 더해갔고 내 꿈은 가위눌린 악몽이 되어버렸다.

그런 순간순간에 ‘꿈꾸는 자’들이 내게 말해주었다. 혼자 꾸는 꿈은 악몽이 될 수 있지만 함께 꾸는 꿈은 희망이 될 수 있음을..내가 꾸는 꿈은, 소유와 탐욕에 젖어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소유와 탐욕이 아닌 삶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의 꿈과 함께 하고 있음을..그 세상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조직해야겠지만, 꿈꾸는 사람들은 오늘 다시 나를 찾아와 나를 전율하게 하고, 벅차오르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보라 저기 꿈꾸는 자가 오고 있다.’

‘상상해 보세요. 천국이 따로 없는 세상을,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함께 공유하는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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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