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이 죽어버린 선덕여왕이 재미가 덜해지긴 했지만 가야민의 ‘전위조직’인 ‘복야회’를 두고 가야출신인 유신과 선덕여왕 비담의 갈등들이 새로운 재미를 준다. 가야는 끌어안되 복야회를 끌어안을 수는 없는 선덕여왕, 신라에 복속됨으로써 가야민을 살리자는 현실적인유신.. 그리고 처절한 희생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혁명을 통해 가야의 독립을 꿈꾸는 복야회의 수장은 이렇게 갈등한다.

“신국(신라)이든, 가야든 가야의 백성들에게 무엇이 다를 것인가” (대사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의미)

그 대사를 들으며 바꿔 보았다. ‘미국이니 한국이니 하는 국가의 틀이 국민들에게는 무엇일까?’ 지켜야 할 그 무엇을 위해 우리는 비장한 언어로 ‘반미’를 외치거나 박지성이 다른 국가의 수비를 뚫고 공하나만 차 넣어도 아파트가 들썩거리도록 환호하는 것일까?

지나친 감정의 분출은 혹 열등감의 다른 표현은 아닐까?


열등감이란 가지지 말자고 하여 없어지는 감정이 아니다.

평생 열등감속에 사는 것이 인간일 것이다.

미국의 풍요로움과 강대함은 그 자체로 부러움이 되고 ‘그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느낌을 주기도 할 것이다.


 지금은 그래도 그렇게 비하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공장 노동자를 ‘공순이’라고 부르던 시절, 주눅이 들어 ‘나’를 드러내기 싫었다. 나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꾸 다른 곳으로 눈길이 향했었다. 그러나 ‘나’를 비로소 당당하게 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자각하고 내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부터였다.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나는 노동자다.” 라고 외치면서 비로소 가슴이 탁 터지던 자긍심을 지닐 수 있었다. 노동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이라는 스스로의 존재확인으로부터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듯 열등감은 나를 존중할 때 극복이 가능해진다. 


미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은 나라? 그래서 어떻다고? 김치 먹고 된장 먹고 마늘 먹는 우리의 발효식품 덕에 신종플루도 잘 안 걸리는 지혜로운 식생활을 지니고 있는, 좀 복작거리긴 하지만 또 따스하기도 한 사람들이 사는 곳 아닌가? 큰 나라, 부자인 나라,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데, 누구 때문에, 누구를 쫓아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니까.


또한 당당함은 나만 잘났다고 할 때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내게 당당하면서도 남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지닐 때 비로소 마음으로부터 당당해진다. 그래야 열등감도 없어진다. ‘반미’를 외친다고 ‘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나로부터 너에 이르기까지 속박이나 추종이 아닌 자유로움으로 열릴 때 열등감은 극복되는 것 아닐까?

'강의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운 꿈은 틀 바꾸기로부터  (2) 2009.12.11
생명의 숨결에 귀 기울이기  (2) 2009.12.09
빌리 엘리어트 감상  (0) 2009.12.07
<88만원세대> 감상  (2) 2009.12.07
우리 안의 미국  (0) 2009.11.09
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