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시원하게 북어 국을 좀 끓여볼까? 싱크대의 여러 개 냄비 중 바닥이 두꺼워 좀 오래 달여야 맛이 나는 음식에 사용하기 좋은 냄비를 꺼내든다. 미국계 다단계 회사로 유명한 A사의 제품이다. 여러해 전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알게 되어 구매하게 된 제품으로 질은 괜찮은 것 같다. 아침을 먹고 빨래를 하기위해 갈아입을 옷을 찾는데 언니가 구매했다가 작아서 준 티셔츠를 꺼내든다. made in USA 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컴퓨터를 켜고 마이크로소프트의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인터넷을 연다. 휴대폰으로 문자가 와서 확인한 후 놓고 보니 휴대폰 앞면은 CYON 이라고 쓰여 있고 뒷면을 보니 LG 라고 표기되어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오른쪽 벽면의 에어컨은 WHISON 이고 바로 옆의 전화기는 TOP phone 이라고 붙어있다.
가을햇살의 유혹에 이끌리며 등산복을 입는다. asics 라고 새겨진 등산양말을 신고 잠바를 걸치려고 보니 가슴에는 HELLO KITTY 라는 글자가 귀여운 로고와 함께 붙어있고 등판에는 크게 도배되어있다. 매일 걸치고 다니면서도 무심했던 것의 발견.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가을산길은 언제나 싱그럽다. 앞서 걸어가는 여성의 운동화 뒤축에 Nike 라고 새겨진 것이 눈에 띈다. 그 옆의 여성 신발은 어두운 색이라 글씨가 선명하지 많아 모르겠는데 역시 알파벳이다. 맞은편에서 씩씩하게 걸어오는 아줌마의 검은색 티셔츠는 AG 라는 큰 글자 옆에 또 뭔가 알파벳이 그려져 있다. “외국인이 파리 시내에서 의미도 모른 체 ‘호남향우회’를 입고 다닌다.” 던 토론회 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역시 또 한분이 티셔츠 앞면을 채운 알파벳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팔을 휘저으며 걸어온다.
약수터에 도착하니 수질검사표가 붙어있다. 월별 검사결과가 기재되어있는 A4 한 장 크기의 코팅된 안내판을 꼼꼼히 살펴보니 여기도 있다. 수질검사처의 TEL- 그리고 FAX_ 그냥 ‘전화’라고 해도 되고 전화기 그림을 넣어도 될 표기에 기어코 알파벳이 들어가 있다.
이건 어디나 상식처럼 되어있는 사항, 실소하며 돌아 나온다. 아직 동면에 들어가지 않은 청설모가 도토리를 찾느라 버석거리는 수풀 옆 나뭇가지에 ‘산불조심리본’이 붙어있다. 그 작은 리본아래쪽에도 GM -뭐라고 쓰여 있는 알파벳을 기어코 또 발견하고 만다. 동네로 들어와 우리 집 골목입구에서 KOSA Mart를 지나 한글 밑에 Dasarang church 라고 적어진 ‘다사랑 교회’를 지나 우리 집 현관 앞에 서서 SAFER plus라고 쓰인 번호 키를 누르고 들어온다.
이제는 당연(?) 하고도 익숙한 모습으로 삶 깊숙이 내면화되어있는 ‘미국화’ 중 무엇보다 단연 으뜸은 영어다. 어딜 가나 영어가 없는 곳이 없고 영어로 되어있지 않은 것이 없는 사회, 중국어나 아랍어나 인도어를 모르는 것은 당연시되면서 미국의 언어체계인 영어를 모르면 위축되고 주눅 들게 하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 대통령부터 동네 가게까지 국민의 자긍심을 끌어올리기는커녕 남의나라 영어가지고 국민을 기죽이는 나라에서, 영어와 함께 밥 먹고 영어와 함께 잠자고 영어로 잠깨고 일어난다. 이제 미국은 ‘반미’적 심리 한 귀퉁이에서 영어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이중화된 이데올로기로 나의내면을 잠식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새 나의 거부와 상관없이 안방 깊숙이에서 나와 동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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