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10대 레즈비언의 기사를 다룬 ‘한겨레21’에서 ‘여고에 다니는 남학생’ 이 ‘치마를 입고 있으면 벗은 것 같아’ 날마다 ‘여자냐, 남자냐’ 나무라는 교사들과 전쟁을 치르고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 차별받기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성적 정체성을 숨기며 사는 경우들도 많았다.(수없이 많을지도)
<킨제이보고서>는 남성의 성행동, 여성의 성행동에 대해 그간 ‘상식적 주류’가 되어온 ‘성지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모든 종류의 성적취향은 ‘등가적’이며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 즉 성적욕망이나 행위에서 남성과 여성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동성간, 이성간, 또 양성간 에도 성은 다양하게 발현될 수 있으며 어느 것도 특정한 틀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실험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과학 연구를 통해 그는 오르가슴척도를 달리 규정할 뿐 아니라 다양한 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킨제이의 논지는 소수자를 배려하라거나 이해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아니다. 즉 누가 누구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상성’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준은 사실 많은 인권담론들에도 유사하게 내포되어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성차별이 싫어도 성전환수술을 하라고 할 수는 없고, 흑인에게 인종차별이 싫으면 피부색을 표백하라고도 할 수 없지만, 동성애자들에겐 이성애자가 되라는 주문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어떤 여성학자의 주장처럼 성은 획일화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된 그 고등학생도 어른들이 말리다 안 되자 ‘그럼 어른이 되고나서 수술하라’고 설득한다. 어른이 되면 사회화를 통해 ‘정상’이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킨제이는 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또한 자신의 체험과 가족들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처음부터 ‘성은 어떤 것’이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적 필요와 권력(힘)의 지위에 따라 ‘집단의 일원이 되길 바라는’ 압력의 논리 (킨제이의 연구를 어렵게 만드는 힘(권력)을 보았듯) 라고 말한다. 또한 정상성과 비정상성에 대한 관점, 이성애적인 것만이 당연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오만과 착각일 수 있는지를, 그러한 생각자체가 비인간적인 것임을 드러낸다. ‘성과학’은 성의 탈신비화를 가져올 수 있고 이는 곧 남성성의 우위적 권력에 도전하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기존의 틀을 고수해야 할 사회적 세력이 존재하고 킨제이의 보고서는 거부된다. 그의 보고서에 대한 수용은 곧 성적욕망의 자유추구 및 쾌락을 인정함으로써 기존의 성역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이중적 잣대나 편견을 근본적으로 되짚어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남성’이 ‘남성다워’야 하고 ‘여성’이 ‘여성다워야’하는 것으로 길들여지면서 ‘정상성’의 기준에 맞게 성적 정체성도 구성되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혹 내게는 그런 요소 없었을까, 나의 성적 정체성도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것일 수도?
“의회 도서관은 뭐든 에로틱한 것은 버리지. 이것은 과학적 손실” 이라고 개탄했던 킨제이나 동성애자인 청년이 “제가 이상한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라는 말이 이 ‘보고서’를 접한 내게 큰 울림으로 남는다.
'강의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88만원세대> 감상 (2) | 2009.12.07 |
---|---|
우리 안의 미국 (0) | 2009.11.09 |
'관계'의 결을 다양화하는 '집단지성' (0) | 2009.10.20 |
기독교에 대한 단상 (0) | 2009.10.20 |
이라크 아프간 참전 군인들을 생각하며 (0) | 2009.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