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아프간 참전 군인들을 생각하며

   지금 한국은 추석을 맞아 며칠간 분주했습니다.

고속도로는 양방향으로 차들이 늘어서고 하늘 길도 분주했지요. 이제 ‘때때옷’ 입고 고샅길에서 뛰노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요즘은 모두 실내에서 컴퓨터게임을 주로 하니), 별로 행복해보이지 않는 얼굴들의 의례적 이동같이 느껴집니다.

텔레비전에선 매해 똑같은 명절특집을 하고 ‘다문화가정’의 새댁들과 종가집의 대가족이 등장하고 ’전통‘과 ’예의‘를 갖춘 우아한 풍경이 넘치지요. 풍성한 음식과 정겨운 가족들로 둘러앉은 ’행복한‘ 가족의 모습입니다.

 실직에 고통스런 가장의 보습이나 식용유세트라도 마련해야 하는 가난한 주부들의 비용걱정이나, 빨간 글씨 날 이라도 쉬고 싶은 장시간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고단함이나, 인간이기를 포기한 ‘대한민국 고3’의 칸 막힌 독서실 등은 풍경 바깥으로 잠시 밀려 난 듯합니다.

그리고 남의나라 전쟁‘에 ’애국‘의 이름으로 참여한 당신들의 모습도 잠시 잊혀 집니다.

마치 두 개의 세계가 밤낮으로 바뀌어 존재하듯 세상은 두 얼굴을 지니고 돌아가고 한가위 둥근달은 묵묵히 인간세상을 비추더이다. 이런 날들을 함께 하지 못하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님들은 먼 타국의 전선에 서서 저 달을 보고 있나요?

전쟁과 번영이라는 숙명적인 결합의 관계’ ‘그 번영의 가장 큰 이익을 얻는 미국의 자본가계급’(남문희, ‘미국의 국가이익과 전쟁’인용)의 이해관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파병’한 걸까요? 지난(至難)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라도 인류가 긴 세월 가꾸어가야 할 민주주의의 가치가 전쟁을 통해 획득이 될까요?

진정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국가, 민족, 재산?...

나치수용소 생존자는 이렇게 회고했다 합니다.


“어느 날 나는 기력을 회복하여 일어날 수 없었다.

벽에 걸린 거울에서 나를 보고 싶었다. 게토에 온 이후로 나는 나를 본 적이 없었다.

죽음의 거울에서 한 사내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그 눈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 -엘리위즐 p818  (강선주, -미국의 21세기 전쟁에 대한 공식화 된 기억: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을 중심으로-에서 재인용)


어쩌면 우리 모두는 나와 우리가 함께 행복해지는 것과는 점점 더 먼 길에서 헤메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 손가락 끝 가시하나만 박혀도 아파하면서 남의 팔이 잘려나가도 무심한 것이 인간이기도 하지만, 내나라 전쟁은 절대 안 되면서 남의나라 전쟁에 파병을 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도 둔감해있으니까요. 내 나라와 남의나라 경계라는 것으로 사람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달리 취급될 수 있는 것일까요?

가을이 깊어 한잎 두잎 지는 낙엽에도 사람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 먼 땅, 살육과 증오의 전선에 서있는 님들의 젊음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사람의 가슴으로 전달해야 할 것은 차가운 실탄이 아닌, 따뜻한 온기여야 함을 더욱 느끼게 하는 가을이거든요...


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