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운명적 틀’이 만들어내는 잡다한 일상들이 질곡으로 느껴져 답답할때가 있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면 가장 강인한 결속집단처럼 보이는 ‘혈연’이라는 구조가 구체적인 생존문제 앞에서 교활하고 허망하게 무너지기도 하는, 매우 허약한 관계일 수도 있음을 새삼 느끼게도 하고,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허상을 마주하는 듯 서글퍼지기도 한다.  친정이니, 시댁이니 사돈에 팔촌까지 줄줄이 얽힌 가족관계의 줄들은 종종 심리적 갈등을 야기하는 까닭이다. 눈치, 체면 이런 것 다 벗어던지고 훌훌 자유롭고 싶은 욕구는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각기 보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겠지만 가족의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도입부터 충격적이고 도발적으로 전개된다.

‘잠에서 깨었을 때’ -깨고 싶지 않은 휴식, 달콤한 잠의 욕구를 떨치고- 그레고르 잠자는 갑충으로 변해있었다.

‘딱딱한 등, 애처로울 정도로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는 영업사원으로 뛰어 다니며 식구들의 삶을 유지했던 그의 노고를 상징적으로 비유한다.

매일 4시 30분이면 일어나야했던 일상, 아침마다 시달렸던 수면부족, 시계바늘과 자명종에 대한 압박은 현대를 사는 노동자들의 숨 막히는 속도, 기계적 시스템의 강박과도 유사하다.

‘직원들을 하나같이 건달나부랭이’로 취급하는 회사에 대한 불만, ‘아침나절 한두 시간만이라도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인간들’ 과 하루아침 출근하지 않자 ’수금부정‘을 의심하는 회사사장에게 볶이면서도 그레고르는 가족들을 위해 일을 놓을 수 없었다. 갑충이 된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출근하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자신이 얼마나 충실한 직원이었는지를 간곡히 설명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입 밖으로 언어화 되지 않는 갑충의 웅얼거림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놓인 아득한 간극을 숨 막히게 보여준다. 이미 노동력을 상실한 자는 자본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한 마리 벌레일 뿐이다. 변신한 그의 모습을 대하며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만큼에서 적절히 반응한다.

아버지는 ‘적의’를 드러내며 꺼이꺼이 울고,

어머니는 뒤로 달아나고,

지배인은 도망치고,

애착의 정도가 컸던 여동생은 일정기간 그를 돌보지만 결국 돌아선다.

그는 ‘아버지에게 걷어차여 피를 철철 흘리며 방안 깊숙이 날아가’ 버렸고 ‘사방이 조용해진’  인간의 바깥으로 밀려 난다.

특히 그는 애착을 지녔던 여동생이 자신의 변한 모습을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에 민감하다. 여동생에게 연정과도 유사한 집착을 보이며, 여동생이 가족들과 하숙인들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에 몰입하고 여동생의 표정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러나 여동생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쓰고 집요하게 관심을 확인하던 그는 마음만 다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상처와 통증을 안게 된다. 하필 왜 사과일까? 달고 맛있는 과일인 사과는 그가 제공했던 가족의 안락을 잃어버리는 순간 폭력의 무기로 변화한다.


어느 날 아침 불시에 ‘정상적’ 일상을 거스른 그레고르 잠자의 변화는 가족전체의 삶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아버지는 말단 은행원들에게 아침식사를 나르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고, 여동생은 계산대 일을 하며 방 한 개는 하숙을 친다. 그레고르가 졌던 짐을 벗어던지자 가족들이 역할을 찾게 되고 세상은 그가 그렇게 죽도록 매달리지 않는데도 ‘별일 없이’ 돌아  간다. 노동력이 상실된 그레고르만 모두에게 소외된 채 골방에 처박힌다.

IMF때 수많은 가장들이 지하철에서 양복을 갈아입고 산행을 하던 시절, 그렇게 내몰린 가장들은 가족의 조건에서도 내몰리는 경우가 많았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노동력을 팔지 못하는 그레고르 잠자에게 국가도 가족도 존재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본으로 유지되는 사회의 냉혹한 현실이다. 더구나 가장 가깝고도 중요한 존재였던 여동생이 가장 강력한 언어로 그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저것에서 벗어나야 해요”

  “내쫓아야 해요”

  “저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저게 오빠라면 인간이 자기 같은 짐승과 살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진작 제 발로 나갔을 거예요”

결국, ‘이제 더는 꼼짝도 할 수 없다’ 는 사실을 깨달은 그레고르 잠자는 ‘사라져야 한다.’ 는 생각을 한다. 공허하고도 평화로운 생각에 빠진 채 밝아오는 새벽을 느끼며 ‘그의 고개는 아래로 푹 고꾸라졌고 그의 콧구멍에서는 마지막 숨이 새어 나왔다’


주검은 파출부할머니가 발견한다.

가족들은 감사기도를 드리고 잠깐 ‘슬픈표정’을 짓는다.

아버지는 하숙인을 내보내고 하루 푹 쉬며 산책을 하기로 결정한다.

  “자 이리들 오라고, 지난 일들은 잊어버려, 그리고 내 생각도 좀 해줘야지.”

그러자 두 여자는 즉시 쪼르르 그에게 달려가 그를 어루만진다. 아버지의 팔에 기대는 여동생, 아버지의 무릎에 쓰러지는 어머니, 그레고르 잠자가 가장일 때 지녔던 권력은 그렇게 또 다른 남성인 아버지에게로 이전된다.

그들은 전차를 타고 근교로 소풍을 나가고 앞으로의 ‘전망’을 펼친다.


카프카는 유대인가정에서 태어나 이방인처럼 살았다. 게다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태인으로 체코사회에도 속하지 못했다. 심지어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운동이었던 시온주의를 신봉하지 않아 같은 유대인집단에서도 소외되었다. 철저히 비주류의 조건을 지녔던 그는 주류의 흐름에 편승하기보다는 일탈을 택한 듯하다. <변신>은 제목부터 ‘정상성’의 틀과 인식을 거부하는 일탈적 주제로 다가온다.

이 작품을 완성한 1912년의 프라하는 자본주의적 일상의 회로가 가동되던 때였고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그 회로에 포섭되어 다람쥐쳇바퀴 도는 삶을 유지하는 노동자이다.

그는 늘 해고에 대한 두려움, 지각(시간)에 대한 압박, 가족에 대한 부양의무에 시달린다. 이렇게 억압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픈 욕망은 그 일상을 수행할 수 없는 벌레라는 형상으로 도출된다.

벌레로 화한 그레고르 잠자의 모습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병들거나 어떤 사유로 노동능력을 상실한 노동자의 상징이기도 하고 인간이 돈(자본)에 종속되지 못할 때 무용지물화 되거나 더럽고 불온시 되는 즉, 벌레취급 하는 사회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카프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을 상징하는 ‘인간다움’의 신체적 형상 및 인간의 활동을 정지해버림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자체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고 하겠다. 인간의 몸, 익숙했던 모든 관행, 습관, 사고방식을 ‘변신’을 통해 거부함으로써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하려 한 것 아닐까. 인간의 눈에는 ‘벌레’라는 ‘불행한’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그레고르에게는 지겹고 고통스러웠던 것들로부터의 결별인 것이다.

벌레로 변한 ‘어느 날 아침’ 에서부터 시작되는 소설도입의 의미는 새로운 아침, 즉, ‘눈 뜸’ ‘사고의 혁명’ 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일상의 현대인에게는 소통되지 않는 ‘벽’으로 작동되겠지만.


카프카의 또 다른 소설 <어느 학술원에서의 보고>를 보면 인간의 조상이었을지도 모르는 원숭이가 인간화로 ‘출구 찾기’를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상자에 갇힌 원숭이 빨간페터가 ‘인간처럼’ 의 훈련에 적극 임하여 ‘인간화’ 되어감으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빨간페터가 인간화되기를 소망하며 타협하는 순간 그는 숲의 자유를 포기해야했고 이빨은 약해지고 도식화되며 일상은 특정한 틀에 규정된다.

이렇듯 카프카의 소설들이 바라본 지점은 인간의 행복을 담아내지 못하는 ‘현대성’에서의 출구를 찾기 위해, 인간들이 발전시켜온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던지는 의문부호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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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