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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세대> 감상

강의실 2009. 12. 7. 21:00
 

딸아이가 올해 수능을 치뤘다. 한국의 대입수능시험은 ‘본다.’ 라기보다는 ‘치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듣기시간에 비행기를 띄우면 안 되고 공무원의 출근시간이 조정되는 등 국가의 대행사이자, 당사자들에겐 반드시 치러야 할 모진 통과의례가 된 수능시험장 앞에는 ‘좋은 성적을 주십사’(그 교회출석 학생에게)고 기도하는 교회의 기도와 찬송가 소리가 들렸다. 고3의 길고 어려운 터널을 통과하려는 딸의 긴장한 얼굴이 사라진 교문 앞에서 만감이 교차했고 ‘부모의 집값이 자녀의 학벌을 결정하는 나라’에서 참으로 힘겨운 대한민국의 아이들을 생각하니 닫힌 철문 앞에서 애잔해지기도 했다.


<88만원세대>에서 저자는 ‘모래땅에 개미지옥을 파놓고 숨어 있다가 그곳에 미끄러진 개미 등 작은 곤충을 잡아먹는 개미귀신’의 이야기를 한다. 개미지옥에 떨어진 개미 등의 곤충들은 일단 개미지옥에 떨어진 이상 잡아먹히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먼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서로를 밑바닥에 밀어 넣기 한다는..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를 도우면서 순간순간 회의했다. 몇 시간의 수면시간을 빼고는 교실의 작은 의자에서 죽어라 파묻혀 꽃다운 나이를 보내는 이 아이가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행복할 것인가? ‘승자독식’의 ‘개미귀신’ 앞에 개별로 발버둥치는 ‘곤충’은 아닌가?


가끔 수업시간에 교수님들은 옛날을 회상하며 “대충 공부해도 취업은 되었기에” 지금의 20대를 안타까워들 하시지만 그러나 나는 결코 예전의 20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당시 대학생이 아닌 산업전선의 노동자들은 지금 강남의 아들딸들과 강북의 아들딸들만큼이나 차이를 지녔다. <88만원세대>에서 말하고 있는 10~20대에 대한 분석 대상도 기본적으로 당시의 20대를 대졸자경우로 일반화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지금 20대의 ‘88만원’집단은 그 당시 노동자계급의 자녀들일 가능성이 높고 곧 20대의 자녀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인 부모들의 처지도 암울한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계층인데도 말이다.


지금의 20대를 자녀로 두고 있는 70년대의 20대 중에서 대학을 갈 수 있었던 계층은 그래도 ‘팔 논이나 송아지’라도 지니고 있거나 작은 구멍가게라도 가진 경우들이었다. 그 이외의 800만 노동자들(70년대 말 기준, 그 중 대다수는 10~20대의 청년들이었다)은 ‘공돌이’ ‘공순이’ 로 불리며 기계처럼 일만했다. 이들이 지금의 88만원세대보다 나은 조건이었다고? 천만의 말씀, 10시간에서 12시간의 야근을 하고 토요일은 커녕 일요일 공휴일도 없었고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단체행동권을 행사하기에도(단체행동권은 금지되어 있었다) 엄청난 결단을 필요로 했던 그때의 노동자들과 그때 대학생들의 20대는 다른 것이었다.

즉, 지금의 20대가 힘겹긴 하지만 대개 노동자부모의 자녀들이 훨씬 더 대물림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지적대로 그 층이 더 광범위해지고 넓어져서 일을 할래야 할 곳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고 부의 집중곡선은 더 가파른 형태를 취하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저자의 지적처럼 기성세대가 독식해서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차이를 지닌 출발 조건이 오늘의 차이를 강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기성세대인 내가 무얼 독식했단 말인가? <88만원 세대>를 읽으며 잠시 ‘열외 적 분류’의 느낌을 지니게 되는 까닭이다.


결국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구체적 내용을 채워가는 문제, 즉 근원적인 불평등의 구조를 변화시키고 잉여축적의 곡선이 더욱 뾰족한 삼각으로 치닫지 못하게 하는 분배정책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며 그 투쟁에 남녀노소가 따로 구분 될 리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자녀의 교육비에 허리가 휘청거리는 부모나(비정규직노동자인 부모도 엄청 많다), 학자금 대출 갚기에 목이 매달려 끌려가는 자녀나, 병들어도 갈 곳이 없는 가난한 노인이나, 어느 한쪽만 해결된다고 될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문제는 언제나 총체적인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을...

옆길로 새는 듯도 하지만 12월 22일자 한겨레신문 <임범의 노천까페> 라는 글에서 그가 복무기간단축과 관련하여 “안보비용을 젊은이들의 노력봉사로 채우는”기성세대의 ‘상식제고’를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요즘의 지식담론은 세대담론화 하는지? 우리사회의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이 과연 세대의 문제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울러 <88만원세대>의 내용이 상큼하고 시원하기도 하지만 계속 목구멍에 걸린 것이 바로 제목부터 세대로 구분하는 지점이었다. ‘승자독식’은 맞지만 ‘세대독식’은 글쎄? 이런 내게 혹자들은 반박할 것인가? “그대가 기성세대여서 불편한 것 아니냐?” 고.


그럼에도 이 책이 주는 현실 진단과 전망적 대안들은 신선했다. 부모로부터 자녀를 ‘인질’ 화 한 우리사회의 교육제도와 해법들도 상쾌했고, 지역기업의 활성화 대안도 설득력 있었다. 특히 ‘농업공무원’ 발상은 신선하고 매력 있는 정책대안으로 느껴졌다. 20대의 농업공무원뿐만 아니라 노인 인력의 농촌귀향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터였다.

그리고 저자가 말미에서 강조한 기존의 질서에 대한 의문제기를 통한 ‘앙팡 테리블’ 즉, ‘창조적 파괴’ 는 기성세대인 나도 공감하여 실천하고픈,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라는 점에 공감한다.

사실 나 혼자 ‘개천의 용’이 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이겠지만  더러운 개천에서 용이 된들 행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모두가 개천이 아닌 푸른 바다의 자유로운 물고기처럼 어울려 살아가는 꿈을 꾼다면 전망은 열릴 것이다.

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