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탄광촌, 새벽이면 연장통을 들고 막장으로 향하는 아버지와 형, 노쇠한 할머니는 갈대숲을 헤매고 다닌다. 탄광노동자들은 파업 중이고 파업을 주동한 형은 경찰에 쫓기며 하얀 빨래위에 붉은 피를 흩뿌리며 끌려가고 앞날이 기획되지 않는 암울한 마을의 골목에 작은 여자아이는 늘 혼자 서 있다. 강인한 아버지는 이 계급적 질곡을 극복할 대안으로 빌리를 권투장으로 내몬다. 부모소득의 엄청난 비중이 자녀의 사교육비로 들어가는 우리의 현실처럼 아버지의 고단한 노동으로 번 돈은 빌리의 태권도‘과외’ 비로 지출된다. 계층상승의 길은 빌리가 성공하는 것뿐이고 “발레를 좋아한다고 해서 게이는 아닌데”, 남자아이니까 태권도가 ‘적합’하다고 강요된다. 마치 강남아이들에게 이미 기득권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강북의 아이들도 열심히 하면 가능할 거라고 믿는 우리의 소시민적 욕망과도 같다.

그러나 빌리는 ‘새처럼’ 날고 싶었다. “춤을 출 때면 그저 좋았고, 몸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고, 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주먹으로 누군가를 치는 권투는 빌리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어릴 때 엄마를 잃은 그리움은 춤을 추며 엄마의 영혼과 교감하고, 엄마를 상상하며, 엄마에게로 날아간다. “태어나자마자”, 아니 “엄마 배속에서부터”, 춤을 춘 ‘풍선’이 되고 싶은 빌리의 꿈인 것이다.


 아버지는 누구나 가고자 하는 성공의길, ‘상식’으로 되어있는 욕망에 빌리를 꿰어 맞추려 했다. 힘든 노동의 대가는 결국 기득권층의 바닥 깔아 주기에 사용되고 의지와 관계없는 학습은 무기력만 키운다. 그러나 다행히 아버지는 아들의 갈망을 볼 줄 아는 시선과 귀를 지녔다. 빌리의 발레에 대한 집착을 ‘정상’이 아니라며 극렬히 분노했고 배신감을 표출했던 그가 빌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갈망을 이해한 것이다.

그것은 파업대열을 이탈해야하는 현실적 고뇌를 동반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위해 출근버스에 몸을 싣게 되고 동료들의 계란세례를 감수한다. ‘새처럼 날고 싶은’ 아들의 꿈과 노동자들의 현실을 개선해야하는 파업행동 사이에서 갈등하며 검은 연탄 더미 속에 서 있는 아버지의 고뇌는 막장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트의 단추만큼이나 비정한 결단을 요구한다. 어떤 것이 진정 옳을까? 개인의 성취와 욕구, 공동의 이해..인간의 삶에서 수시로 마주쳐야하는 갈래이고 많은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갈린다.


영화의 장면들이 아슴하게 남는다. 빌리의 재능을 알아 본 발레선생이 아버지와 다투고 떠난 후 좁은 벽안의 변기위에서 몸의 열기를 모아 박차고 뛰어나가는 빌리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 공간은 억압의 상징으로 와 닿았다. 공간 밖으로 날아올라 접질러진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춤추며 뛰어가는 등 뒤로 펼쳐지는 파란바다는 꿈처럼 해말갛지만 다시 억압과 현실의 녹슨 슬레이트 벽 앞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 절망의 벽은, 자신 또한 억압의 희생자이면서 재생산해내는 주체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결단이 넘어서게 해준다.

타성과 자아성취의 욕망사이에서 빌리 부자가 선택한 자존의 꿈은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또한  소수의 성취이자 부러움의 대상일 뿐, 빌리가 섰던 벽만큼이나  돌아서 보이는 현실은 거대한 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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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세대> 감상

강의실 2009. 12. 7. 21:00
 

딸아이가 올해 수능을 치뤘다. 한국의 대입수능시험은 ‘본다.’ 라기보다는 ‘치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듣기시간에 비행기를 띄우면 안 되고 공무원의 출근시간이 조정되는 등 국가의 대행사이자, 당사자들에겐 반드시 치러야 할 모진 통과의례가 된 수능시험장 앞에는 ‘좋은 성적을 주십사’(그 교회출석 학생에게)고 기도하는 교회의 기도와 찬송가 소리가 들렸다. 고3의 길고 어려운 터널을 통과하려는 딸의 긴장한 얼굴이 사라진 교문 앞에서 만감이 교차했고 ‘부모의 집값이 자녀의 학벌을 결정하는 나라’에서 참으로 힘겨운 대한민국의 아이들을 생각하니 닫힌 철문 앞에서 애잔해지기도 했다.


<88만원세대>에서 저자는 ‘모래땅에 개미지옥을 파놓고 숨어 있다가 그곳에 미끄러진 개미 등 작은 곤충을 잡아먹는 개미귀신’의 이야기를 한다. 개미지옥에 떨어진 개미 등의 곤충들은 일단 개미지옥에 떨어진 이상 잡아먹히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먼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서로를 밑바닥에 밀어 넣기 한다는..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를 도우면서 순간순간 회의했다. 몇 시간의 수면시간을 빼고는 교실의 작은 의자에서 죽어라 파묻혀 꽃다운 나이를 보내는 이 아이가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행복할 것인가? ‘승자독식’의 ‘개미귀신’ 앞에 개별로 발버둥치는 ‘곤충’은 아닌가?


가끔 수업시간에 교수님들은 옛날을 회상하며 “대충 공부해도 취업은 되었기에” 지금의 20대를 안타까워들 하시지만 그러나 나는 결코 예전의 20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당시 대학생이 아닌 산업전선의 노동자들은 지금 강남의 아들딸들과 강북의 아들딸들만큼이나 차이를 지녔다. <88만원세대>에서 말하고 있는 10~20대에 대한 분석 대상도 기본적으로 당시의 20대를 대졸자경우로 일반화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지금 20대의 ‘88만원’집단은 그 당시 노동자계급의 자녀들일 가능성이 높고 곧 20대의 자녀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인 부모들의 처지도 암울한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계층인데도 말이다.


지금의 20대를 자녀로 두고 있는 70년대의 20대 중에서 대학을 갈 수 있었던 계층은 그래도 ‘팔 논이나 송아지’라도 지니고 있거나 작은 구멍가게라도 가진 경우들이었다. 그 이외의 800만 노동자들(70년대 말 기준, 그 중 대다수는 10~20대의 청년들이었다)은 ‘공돌이’ ‘공순이’ 로 불리며 기계처럼 일만했다. 이들이 지금의 88만원세대보다 나은 조건이었다고? 천만의 말씀, 10시간에서 12시간의 야근을 하고 토요일은 커녕 일요일 공휴일도 없었고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단체행동권을 행사하기에도(단체행동권은 금지되어 있었다) 엄청난 결단을 필요로 했던 그때의 노동자들과 그때 대학생들의 20대는 다른 것이었다.

즉, 지금의 20대가 힘겹긴 하지만 대개 노동자부모의 자녀들이 훨씬 더 대물림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지적대로 그 층이 더 광범위해지고 넓어져서 일을 할래야 할 곳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고 부의 집중곡선은 더 가파른 형태를 취하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저자의 지적처럼 기성세대가 독식해서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차이를 지닌 출발 조건이 오늘의 차이를 강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기성세대인 내가 무얼 독식했단 말인가? <88만원 세대>를 읽으며 잠시 ‘열외 적 분류’의 느낌을 지니게 되는 까닭이다.


결국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구체적 내용을 채워가는 문제, 즉 근원적인 불평등의 구조를 변화시키고 잉여축적의 곡선이 더욱 뾰족한 삼각으로 치닫지 못하게 하는 분배정책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며 그 투쟁에 남녀노소가 따로 구분 될 리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자녀의 교육비에 허리가 휘청거리는 부모나(비정규직노동자인 부모도 엄청 많다), 학자금 대출 갚기에 목이 매달려 끌려가는 자녀나, 병들어도 갈 곳이 없는 가난한 노인이나, 어느 한쪽만 해결된다고 될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문제는 언제나 총체적인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을...

옆길로 새는 듯도 하지만 12월 22일자 한겨레신문 <임범의 노천까페> 라는 글에서 그가 복무기간단축과 관련하여 “안보비용을 젊은이들의 노력봉사로 채우는”기성세대의 ‘상식제고’를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요즘의 지식담론은 세대담론화 하는지? 우리사회의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이 과연 세대의 문제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울러 <88만원세대>의 내용이 상큼하고 시원하기도 하지만 계속 목구멍에 걸린 것이 바로 제목부터 세대로 구분하는 지점이었다. ‘승자독식’은 맞지만 ‘세대독식’은 글쎄? 이런 내게 혹자들은 반박할 것인가? “그대가 기성세대여서 불편한 것 아니냐?” 고.


그럼에도 이 책이 주는 현실 진단과 전망적 대안들은 신선했다. 부모로부터 자녀를 ‘인질’ 화 한 우리사회의 교육제도와 해법들도 상쾌했고, 지역기업의 활성화 대안도 설득력 있었다. 특히 ‘농업공무원’ 발상은 신선하고 매력 있는 정책대안으로 느껴졌다. 20대의 농업공무원뿐만 아니라 노인 인력의 농촌귀향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터였다.

그리고 저자가 말미에서 강조한 기존의 질서에 대한 의문제기를 통한 ‘앙팡 테리블’ 즉, ‘창조적 파괴’ 는 기성세대인 나도 공감하여 실천하고픈,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라는 점에 공감한다.

사실 나 혼자 ‘개천의 용’이 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이겠지만  더러운 개천에서 용이 된들 행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모두가 개천이 아닌 푸른 바다의 자유로운 물고기처럼 어울려 살아가는 꿈을 꾼다면 전망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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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미국

강의실 2009. 11. 9. 21:04
 

오늘은 시원하게 북어 국을 좀 끓여볼까? 싱크대의 여러 개 냄비 중 바닥이 두꺼워 좀 오래 달여야 맛이 나는 음식에 사용하기 좋은 냄비를 꺼내든다. 미국계 다단계 회사로 유명한 A사의 제품이다. 여러해 전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알게 되어 구매하게 된 제품으로 질은 괜찮은 것 같다. 아침을 먹고 빨래를 하기위해 갈아입을 옷을 찾는데 언니가 구매했다가 작아서 준 티셔츠를 꺼내든다. made in USA 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컴퓨터를 켜고 마이크로소프트의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인터넷을 연다. 휴대폰으로 문자가 와서 확인한 후 놓고 보니 휴대폰 앞면은 CYON 이라고 쓰여 있고 뒷면을 보니 LG 라고 표기되어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오른쪽 벽면의 에어컨은 WHISON 이고 바로 옆의 전화기는 TOP phone 이라고 붙어있다.


가을햇살의 유혹에 이끌리며 등산복을 입는다. asics 라고 새겨진 등산양말을 신고 잠바를 걸치려고 보니 가슴에는 HELLO KITTY 라는 글자가 귀여운 로고와 함께 붙어있고 등판에는 크게 도배되어있다. 매일 걸치고 다니면서도 무심했던 것의 발견.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가을산길은 언제나 싱그럽다. 앞서 걸어가는 여성의 운동화 뒤축에 Nike 라고 새겨진 것이 눈에 띈다. 그 옆의 여성 신발은 어두운 색이라 글씨가 선명하지 많아 모르겠는데 역시 알파벳이다. 맞은편에서 씩씩하게 걸어오는 아줌마의 검은색 티셔츠는 AG 라는 큰 글자 옆에 또 뭔가 알파벳이 그려져 있다. “외국인이 파리 시내에서 의미도 모른 체 ‘호남향우회’를 입고 다닌다.” 던 토론회 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역시 또 한분이 티셔츠 앞면을 채운 알파벳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팔을 휘저으며 걸어온다.

약수터에 도착하니 수질검사표가 붙어있다. 월별 검사결과가 기재되어있는 A4 한 장 크기의 코팅된 안내판을 꼼꼼히 살펴보니 여기도 있다. 수질검사처의 TEL- 그리고 FAX_ 그냥 ‘전화’라고 해도 되고 전화기 그림을 넣어도 될 표기에 기어코 알파벳이 들어가 있다.

이건 어디나 상식처럼 되어있는 사항, 실소하며 돌아 나온다. 아직 동면에 들어가지 않은 청설모가 도토리를 찾느라 버석거리는 수풀 옆 나뭇가지에 ‘산불조심리본’이 붙어있다. 그 작은 리본아래쪽에도 GM -뭐라고 쓰여 있는 알파벳을 기어코 또 발견하고 만다. 동네로 들어와 우리 집 골목입구에서 KOSA Mart를 지나 한글 밑에 Dasarang church 라고 적어진 ‘다사랑 교회’를 지나 우리 집 현관 앞에 서서 SAFER plus라고 쓰인 번호 키를 누르고 들어온다.


이제는 당연(?) 하고도 익숙한 모습으로 삶 깊숙이 내면화되어있는 ‘미국화’ 중 무엇보다 단연 으뜸은 영어다. 어딜 가나 영어가 없는 곳이 없고 영어로 되어있지 않은 것이 없는 사회, 중국어나 아랍어나 인도어를 모르는 것은 당연시되면서 미국의 언어체계인 영어를 모르면 위축되고 주눅 들게 하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 대통령부터 동네 가게까지 국민의 자긍심을 끌어올리기는커녕 남의나라 영어가지고 국민을 기죽이는 나라에서, 영어와 함께 밥 먹고 영어와 함께 잠자고 영어로 잠깨고 일어난다. 이제 미국은 ‘반미’적 심리 한 귀퉁이에서 영어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이중화된 이데올로기로 나의내면을 잠식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새 나의 거부와 상관없이 안방 깊숙이에서 나와 동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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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성에 대한 가치존중의 메세지


 언젠가 10대 레즈비언의 기사를 다룬 ‘한겨레21’에서 ‘여고에 다니는 남학생’ 이 ‘치마를 입고 있으면 벗은 것 같아’ 날마다 ‘여자냐, 남자냐’ 나무라는 교사들과 전쟁을 치르고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 차별받기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성적 정체성을 숨기며 사는 경우들도 많았다.(수없이 많을지도) 


<킨제이보고서>는 남성의 성행동, 여성의 성행동에 대해 그간 ‘상식적 주류’가 되어온 ‘성지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모든 종류의 성적취향은 ‘등가적’이며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 즉 성적욕망이나 행위에서 남성과 여성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동성간, 이성간, 또 양성간 에도 성은 다양하게 발현될 수 있으며 어느 것도 특정한 틀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실험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과학 연구를 통해 그는 오르가슴척도를 달리 규정할 뿐 아니라 다양한 성이 있음을 드러낸다. 킨제이의 논지는 소수자를 배려하라거나 이해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아니다. 즉 누가 누구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상성’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준은 사실 많은 인권담론들에도 유사하게 내포되어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성차별이 싫어도 성전환수술을 하라고 할 수는 없고, 흑인에게 인종차별이 싫으면 피부색을 표백하라고도 할 수 없지만, 동성애자들에겐 이성애자가 되라는 주문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어떤 여성학자의 주장처럼 성은 획일화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된 그 고등학생도 어른들이 말리다 안 되자 ‘그럼 어른이 되고나서 수술하라’고 설득한다. 어른이 되면 사회화를 통해 ‘정상’이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킨제이는 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또한 자신의 체험과 가족들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처음부터 ‘성은 어떤 것’이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 정치적 필요와 권력(힘)의 지위에 따라 ‘집단의 일원이 되길 바라는’ 압력의 논리 (킨제이의 연구를 어렵게 만드는 힘(권력)을 보았듯) 라고 말한다. 또한 정상성과 비정상성에 대한 관점, 이성애적인 것만이 당연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오만과 착각일 수 있는지를, 그러한 생각자체가 비인간적인 것임을 드러낸다. ‘성과학’은 성의 탈신비화를 가져올 수 있고 이는 곧 남성성의 우위적 권력에 도전하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기존의 틀을 고수해야 할 사회적 세력이 존재하고 킨제이의 보고서는 거부된다. 그의 보고서에 대한 수용은 곧 성적욕망의 자유추구 및 쾌락을 인정함으로써 기존의 성역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에 대한 이중적 잣대나 편견을 근본적으로 되짚어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남성’이 ‘남성다워’야 하고 ‘여성’이 ‘여성다워야’하는 것으로 길들여지면서 ‘정상성’의 기준에 맞게 성적 정체성도 구성되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혹 내게는 그런 요소 없었을까, 나의 성적 정체성도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것일 수도?


“의회 도서관은 뭐든 에로틱한 것은 버리지. 이것은 과학적 손실” 이라고 개탄했던 킨제이나 동성애자인 청년이 “제가 이상한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라는 말이 이 ‘보고서’를 접한 내게 큰 울림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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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
지난해 여름인가, 휴대폰으로 어떤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000씨입니까?”

“그런데요”

“예전에 00에 다니신 분 맞지요?”

“네” 이 대목에서 반가움에 목소리가 커졌다.

남자는 자기 신원을 밝힌 후 “00에 다닌 어떤 사람을 찾는다.”며 “좀 길게 통화해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00 이라는 대명사에 경계심을 풀고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사연인즉, 청년 때 00에 다닌 어떤 여성과 교제했는데 작은 오해로 헤어지게 되었다며 회사 앞 대림동의 ‘영화다방’에서 마지막 헤어지게 된 상황을 자세히 묘사했다.

요는 늘 마음에 아픔이 있었다고, 그 여성이 생각나서 어느 날 인터넷으로 00 을 쳐보았더니 내 이름이 뜨고 오래 전 출판한  책제목도 나오고 일했던 곳도 나오기에 거치고 거쳐 연락이 닿았다는 것이다. 이 책을 어렵게 구해서(이미 품절이니) 읽었더니 더욱 그 여성의 상황이 이해되고 안쓰러워 너무 가슴이 아프다는 것이며, 이제 무슨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꼭 한번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 남성의 소망은 이루어주지 못했지만 생판 모르는 어떤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내 정보를 파악하게 되고 수십 년 전의 인연 끝자락을 되찾아오는 것을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던 경험이다.
그런데 왜 날 찾아 올 첫사랑은 없는가!!


우리 집은 공부하는 학생이 둘이니 일요일이면 나와 딸이 컴퓨터쟁탈의 경쟁을 벌인다. 딸이 고3이라 EBS강의나 MP3음악파일 다운로드를 많이 하기 때문에 주로 나는 아이가 없는 시간을 이용하지만 컴맹을 겨우 벗어난 기계치인 나에게도 웹 세계에 담긴 무한한 정보와 편리함은 실생활이 되었다. 도서구매에서 ‘매실엑기스 만들기’ 등 궁금증해결에서 쇼핑까지 컴퓨터는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나보다 똑똑한 우리’에 의해 ‘웹을 넘어 경제와 실생활을 지배하는 집단지성’을 옹호, 전망한다. ‘집단지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민주주의’이며 민주주의의 내용은 ‘평등’과 ‘자유’인데 웹의 세상은 그것에 한층 더 다가가게 한다는 것. 이러한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조직화’가 필요하며 ‘사회의 조직화’는 탈 권위 리더십을 통해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적 사례의 예로 “혁신과 창의성은 개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나오며 리더십은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것을 재미있게 여기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는 노키아 명예회장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사실 촛불집회 때 인터넷이 없었다면 10만이 시청광장을 메우지는 못했을 것이고 노무현전대통령의 서거 때 인터넷이 아니었다면 ‘500만의 문상객’이 줄을 잇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인터넷이 없었다면 시위 군중에 대한 폭력은 더 잔인했을 수 있고, 정치인들의 비리는 좀 더 가려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인터넷을 통해 입장이 공유되는 사람들이 모이고 공감과 친밀감이 형성되고 연인도 탄생하고 결혼도 하는 ‘친밀감의 구조변동’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신종플루의 원인과 예측 및 정부의 정책이 검증되고 박재범의 ‘추방’이 정당한지 부당한지를 토론한다. 비록 해악을 끼치는 이기심과 폭력도 많고 동반자살자도 나오긴 하지만, ‘이성’을 지닌 사람들은 재생산과 배포가 용이한 이 과정을 통해 건강한 지성으로 걸러 가는 측면이 더 클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웹 때문에 독자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 무리를 따라가기 보다는, 다양한 의견을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맹목적 맹신이 훨씬 위험 할 수 있기에, 웹은 사상의 자유에 유익하다”는 주장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집단지성의 힘은 다양한 전문성의 결집이 가능한 것이고 서로 보완과 협력을 통해 ‘양질전화’를 이룰 수 있으며, 변화와 창조의 카타르시스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러 행복해지기도 하지 않는가.


지난해 말 블로그를 만들었다. 어느 날 블로그에 올린 친구의 글로 인해 접속자가 하루 500명이 넘는 현상이 며칠간 계속되었고 전체 조회 수가 순식간에 1만 명이 넘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 후 접속자는 다시 지인들의 방문정도로 가라앉았고 흥분과 허탈을 동시에 맛보았다. 내면의 욕구를 잘 들여다 본 경험이었다. 그냥 글을 쓰고 파일로 작성해두면 될 것을 왜 굳이 블로그를 만드는가? 요는 공유하고 싶고, 공감을 나누고 싶고,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드러냄으로써 정화되는 ‘자기치유’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은 ‘관계의 가장 높은 질은 입장을 같이하는 것’ 이라고 했다.

‘집단지성’의 의미는 ‘입장’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그리고 그 ‘입장’의 내용적 결을 가다듬고 높여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고자 한 키워드 또한 ‘공유’ 와 ‘함께’ 가 아닐까.


사실 이 책을 들고 막막했다. 날마다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나는 한 번도 게임을 해 본적도 없고 한글자판도 독수리타법으로 이용하고 검색도 서툴다.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싸이’를 하지만 웹에서 사용하는 용어도 모르는 것투성이다. 컴퓨터는 ‘정보력의 차이’라는 권력을 만들고 소외를 경험하게 한다는 말이 실감 날 때도 있다. 그러나 변화를 두려워만 한다면 사회는 정체 될 것이고 다른 의미에서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 또는 기득권의 권력 또한 더욱 오만해질 것이다.


“집단적 지성을 바탕으로 위키피디아가 전문가 집단인 브리태니커를 이겼듯이” 집단화 된 ‘지성’들은 소수의 부당한 권력을 응징하기도 할 것이라는 믿음도 함께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