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한 단상
고백하는데 나는 ‘예배방해 죄’라는 기이한(?) 죄명으로 징역살이를 한 적이 있다.(그래서 아침마다 00학우가 먹는 두부 맛, 잘 안다 ㅎㅎ) 내용은 부활절 새벽에 여의도에서 열렸던 ‘부활절연합예배’장에서 마이크를 탈취(?)하여 시위를 하였고 결과적으로 예배를 방해하였다는 것인데 이 경우는 교회가 고소할 경우에만 성립된다. 당시 어느 곳에서도 들어주지 않고 보도하지 않아 꽉 막힌 노동문제를 호소(?)하기 위해 여의도 새벽 예배장소를 택한 것은, 우리가(6명) 당시 모두 기독교인이었고(지금은 아니다) 성서의 가르침대로 모두가 진실을 외면할 때 ‘소리치는 돌’의 역할을 해야 한다 는 의미였다. 결국 2심에서는 교회 측에서도 창피해서였는지 ‘예배방해’ 죄목은 빠졌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이라는 내용만 남아 있었다. 이렇게 개인사를 늘어놓은 것은 한국의 기독교를 생각하면 나는 목에 무엇인가 턱 걸리는 것 같은 답답함과 억울함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교단에서의 답답함이야 포기상태니 그렇다 쳐도 진보라고 이야기되던 일부 모 교회, 또 가톨릭의 몇몇 분들이 보여준 여러 가지 배신과 이중성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에 대한 단상들은 너무 많고 복잡하니 후일을 기약하겠다.
불교나 유교가 성행했던 한국에 선교사들을 통해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불가피하게 서구의 가치와 문화가 유입되었고 기독교의 흐름도 서구적 특히 미국화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논문을 보니 더욱 그렇다. 김선욱의 논문에서 ‘청교도이주에서 시작된 미국의 기독교는 신의 소명을 받은 ‘선민’의식을 담고 있었고 이것은 평등과는 다른 의식’ 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류대영의 논문에 나타난 ‘‘전 천년설’ - 악마의 음모(혼란야기 세력-공산주의) -마니교적 신앙’ 으로 이어지고 ‘사탄과의 싸움에서 선(善)인 미국의 주도적 역할에 대한 믿음’으로 연결된다. 한국의 보수기독교단이 이 방식과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그 사례들도 거론되었다. 논문에서도 예를 들었지만 실제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시절의 ‘구국 기도회’ 가 열리던 장면들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한 외형은 좀 달라져도 여전히 종교는 정치권력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느낀다.
영화 <할미꽃>에서 보면 그 지역에는 상대와 중대 하대라는 동네가 있었고 그 중 지금은 풍동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하대마을은 게급적으로도 하층민의 마을이었다고 한다. 양반동네였던 상대와 중대는 ‘좌익’ 활동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연좌제로 고통 받은 사람들이 많은 반면, 하대마을은 좌익을 총살한 경우도 존재하는 다른 모습의 전쟁과 분단을 겪었다. 그런데 그 후 하대마을 사람들이 빨갱이라면 치를 떠는 반공 우익적 기독교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며 참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의 일부 기독교가 ‘선악적구도’에서 표출된 악마(공산주의)와 싸우는 의인들로 생각하듯이 혹 이 경우도 예전의 계급적 소외와 분노로(여전히 남아있었다) 기독교의 선악적 구도를 자신들을 합리화하는 심리적 도구로 작동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 시간에 이야기 나누었던 ‘역사적 뿌리 없는 미국’ 이 허약한 정신적 토대 때문에 기독교를 신봉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라는 상상처럼.
물론 같은 상황이라도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고 철저한 분석을 통한 통계 같은 것도 없으니 뭐라 단정할 수 없지만 그런 생각이 듦을..
또 어떤 선생님은 이데올로기의 최상층은 종교라고 하였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기독교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산업사회의 속도를 급진전시킨 테일러리즘의 원리는 *심한과업(공정한 작업량) *표준조건(개인의 조건이 고려되지 않는) *보상임금 *벌금(벌칙) 등으로 기독교의 청교도적 ‘소명’ ‘금욕’ 의 정신과 밀접하다. 산업사회에 적합지 않은 ‘돈키호테’같은 이는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고,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규율이 만들어지고 정상, 비정상의 경계가 작동하는 것이다. 미국사회의 호황기인 “1916년에 감리교가 ‘금주운동’을 벌였다”(김선욱 논문)는 것도 당시의 경제적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철강노동자들의 파업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던 이 때 노동자들의 금욕을 강조하는 측면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토론장과 결집장소로 활용되던 ‘술집모임’을 규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 미국이 공식적으로 ‘금주법’을 발효했던 때도 상류층은 밀주거래를 통해 자신들의 아지트에서 술을 즐겼던 것을 보면. (소설, 『위대한 케츠비』참조)
물론 상류층의 행태와 기독교인들의 행위를 증빙자료 없이 작위적으로 연결한다 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무관할까?
가장 잘된 문장은 성경책에 있다는 이야기도 숫하게 들었고 성경을 수십 번 탐독했다는 사람도 보았다. 모든 진리는 성경에 있다는 말도 거의 ‘상식’처럼 되어있다. 그러나 남들은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는 성경을 나는 아무리 읽어 보려 해도 참 힘들었다. 사회와 격리된 공간에서 어느 목사님이 넣어 준 ‘공동번역성서’를 ‘감동’받아보려고 읽긴 했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라서 그렇겠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남들처럼 나도 성경을 감동적으로 접했다는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은데 그게 안 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기독교의 정신을 존중한다. 기독교는 잘 적응되지 않지만 예수의 위대한 삶은 사랑하고 존경한다. 내세의 하늘 꼭대기를 바라보는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께서 행하셨든 지상의 사람 관계들 속에서 평등과 평화를 실천하는 종교행위자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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