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운명적 틀’이 만들어내는 잡다한 일상들이 질곡으로 느껴져 답답할때가 있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면 가장 강인한 결속집단처럼 보이는 ‘혈연’이라는 구조가 구체적인 생존문제 앞에서 교활하고 허망하게 무너지기도 하는, 매우 허약한 관계일 수도 있음을 새삼 느끼게도 하고,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허상을 마주하는 듯 서글퍼지기도 한다.  친정이니, 시댁이니 사돈에 팔촌까지 줄줄이 얽힌 가족관계의 줄들은 종종 심리적 갈등을 야기하는 까닭이다. 눈치, 체면 이런 것 다 벗어던지고 훌훌 자유롭고 싶은 욕구는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각기 보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겠지만 가족의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도입부터 충격적이고 도발적으로 전개된다.

‘잠에서 깨었을 때’ -깨고 싶지 않은 휴식, 달콤한 잠의 욕구를 떨치고- 그레고르 잠자는 갑충으로 변해있었다.

‘딱딱한 등, 애처로울 정도로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는 영업사원으로 뛰어 다니며 식구들의 삶을 유지했던 그의 노고를 상징적으로 비유한다.

매일 4시 30분이면 일어나야했던 일상, 아침마다 시달렸던 수면부족, 시계바늘과 자명종에 대한 압박은 현대를 사는 노동자들의 숨 막히는 속도, 기계적 시스템의 강박과도 유사하다.

‘직원들을 하나같이 건달나부랭이’로 취급하는 회사에 대한 불만, ‘아침나절 한두 시간만이라도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인간들’ 과 하루아침 출근하지 않자 ’수금부정‘을 의심하는 회사사장에게 볶이면서도 그레고르는 가족들을 위해 일을 놓을 수 없었다. 갑충이 된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출근하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자신이 얼마나 충실한 직원이었는지를 간곡히 설명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입 밖으로 언어화 되지 않는 갑충의 웅얼거림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놓인 아득한 간극을 숨 막히게 보여준다. 이미 노동력을 상실한 자는 자본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한 마리 벌레일 뿐이다. 변신한 그의 모습을 대하며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만큼에서 적절히 반응한다.

아버지는 ‘적의’를 드러내며 꺼이꺼이 울고,

어머니는 뒤로 달아나고,

지배인은 도망치고,

애착의 정도가 컸던 여동생은 일정기간 그를 돌보지만 결국 돌아선다.

그는 ‘아버지에게 걷어차여 피를 철철 흘리며 방안 깊숙이 날아가’ 버렸고 ‘사방이 조용해진’  인간의 바깥으로 밀려 난다.

특히 그는 애착을 지녔던 여동생이 자신의 변한 모습을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에 민감하다. 여동생에게 연정과도 유사한 집착을 보이며, 여동생이 가족들과 하숙인들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에 몰입하고 여동생의 표정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러나 여동생의 마음을 얻으려고 애쓰고 집요하게 관심을 확인하던 그는 마음만 다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상처와 통증을 안게 된다. 하필 왜 사과일까? 달고 맛있는 과일인 사과는 그가 제공했던 가족의 안락을 잃어버리는 순간 폭력의 무기로 변화한다.


어느 날 아침 불시에 ‘정상적’ 일상을 거스른 그레고르 잠자의 변화는 가족전체의 삶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아버지는 말단 은행원들에게 아침식사를 나르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고, 여동생은 계산대 일을 하며 방 한 개는 하숙을 친다. 그레고르가 졌던 짐을 벗어던지자 가족들이 역할을 찾게 되고 세상은 그가 그렇게 죽도록 매달리지 않는데도 ‘별일 없이’ 돌아  간다. 노동력이 상실된 그레고르만 모두에게 소외된 채 골방에 처박힌다.

IMF때 수많은 가장들이 지하철에서 양복을 갈아입고 산행을 하던 시절, 그렇게 내몰린 가장들은 가족의 조건에서도 내몰리는 경우가 많았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노동력을 팔지 못하는 그레고르 잠자에게 국가도 가족도 존재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본으로 유지되는 사회의 냉혹한 현실이다. 더구나 가장 가깝고도 중요한 존재였던 여동생이 가장 강력한 언어로 그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저것에서 벗어나야 해요”

  “내쫓아야 해요”

  “저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저게 오빠라면 인간이 자기 같은 짐승과 살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진작 제 발로 나갔을 거예요”

결국, ‘이제 더는 꼼짝도 할 수 없다’ 는 사실을 깨달은 그레고르 잠자는 ‘사라져야 한다.’ 는 생각을 한다. 공허하고도 평화로운 생각에 빠진 채 밝아오는 새벽을 느끼며 ‘그의 고개는 아래로 푹 고꾸라졌고 그의 콧구멍에서는 마지막 숨이 새어 나왔다’


주검은 파출부할머니가 발견한다.

가족들은 감사기도를 드리고 잠깐 ‘슬픈표정’을 짓는다.

아버지는 하숙인을 내보내고 하루 푹 쉬며 산책을 하기로 결정한다.

  “자 이리들 오라고, 지난 일들은 잊어버려, 그리고 내 생각도 좀 해줘야지.”

그러자 두 여자는 즉시 쪼르르 그에게 달려가 그를 어루만진다. 아버지의 팔에 기대는 여동생, 아버지의 무릎에 쓰러지는 어머니, 그레고르 잠자가 가장일 때 지녔던 권력은 그렇게 또 다른 남성인 아버지에게로 이전된다.

그들은 전차를 타고 근교로 소풍을 나가고 앞으로의 ‘전망’을 펼친다.


카프카는 유대인가정에서 태어나 이방인처럼 살았다. 게다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태인으로 체코사회에도 속하지 못했다. 심지어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운동이었던 시온주의를 신봉하지 않아 같은 유대인집단에서도 소외되었다. 철저히 비주류의 조건을 지녔던 그는 주류의 흐름에 편승하기보다는 일탈을 택한 듯하다. <변신>은 제목부터 ‘정상성’의 틀과 인식을 거부하는 일탈적 주제로 다가온다.

이 작품을 완성한 1912년의 프라하는 자본주의적 일상의 회로가 가동되던 때였고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그 회로에 포섭되어 다람쥐쳇바퀴 도는 삶을 유지하는 노동자이다.

그는 늘 해고에 대한 두려움, 지각(시간)에 대한 압박, 가족에 대한 부양의무에 시달린다. 이렇게 억압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픈 욕망은 그 일상을 수행할 수 없는 벌레라는 형상으로 도출된다.

벌레로 화한 그레고르 잠자의 모습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병들거나 어떤 사유로 노동능력을 상실한 노동자의 상징이기도 하고 인간이 돈(자본)에 종속되지 못할 때 무용지물화 되거나 더럽고 불온시 되는 즉, 벌레취급 하는 사회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카프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을 상징하는 ‘인간다움’의 신체적 형상 및 인간의 활동을 정지해버림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자체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고 하겠다. 인간의 몸, 익숙했던 모든 관행, 습관, 사고방식을 ‘변신’을 통해 거부함으로써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하려 한 것 아닐까. 인간의 눈에는 ‘벌레’라는 ‘불행한’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그레고르에게는 지겹고 고통스러웠던 것들로부터의 결별인 것이다.

벌레로 변한 ‘어느 날 아침’ 에서부터 시작되는 소설도입의 의미는 새로운 아침, 즉, ‘눈 뜸’ ‘사고의 혁명’ 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일상의 현대인에게는 소통되지 않는 ‘벽’으로 작동되겠지만.


카프카의 또 다른 소설 <어느 학술원에서의 보고>를 보면 인간의 조상이었을지도 모르는 원숭이가 인간화로 ‘출구 찾기’를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상자에 갇힌 원숭이 빨간페터가 ‘인간처럼’ 의 훈련에 적극 임하여 ‘인간화’ 되어감으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빨간페터가 인간화되기를 소망하며 타협하는 순간 그는 숲의 자유를 포기해야했고 이빨은 약해지고 도식화되며 일상은 특정한 틀에 규정된다.

이렇듯 카프카의 소설들이 바라본 지점은 인간의 행복을 담아내지 못하는 ‘현대성’에서의 출구를 찾기 위해, 인간들이 발전시켜온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던지는 의문부호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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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
 

          ‘도라산’ 을 돌아 도는 마음.

                                   

여행은 언제나 호기심과 설렘을 동반하는 바, 규격화되고 반복되는 일상의 공간을 떠나 자연으로 뛰쳐나가고픈 인간의 원초적 갈망이 내재해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 수업시간보다 30여분이나 이른 약속인데도 지각생이 거의 없는 출석률이 그 진실을 증명해주었다. 책가방을 벗어낸 상큼하고 가벼운 옷차림들, 특히 교수님의 빨간색 점퍼는 강의실에서의 정돈된 이미지를 풀어내주는 편안한 느낌을 주었고 얄궂은 봄 날씨도 이날은 청명해져서 연초록의 느티 아래 퍼지는 상큼한 라일락 향기처럼 우리들의 표정을 더욱 상기하게 했다.

8시 50분에 출발한 버스가 도시를 벗어나는 동안에는, 새벽 3시에 귀가하여 잠자리에 들었다는 친구, 못 일어날까봐 시간마다 깼다는 친구, 그리고 다섯 시에 일어나 식구들의 하루를 예비해두고 온 나, 모두 못다 한 잠에 빠져 들었다.

“이런 모두 잠들었네.”라는 교수님 한탄(?)에 우리 모두는 비로소 ‘중간고사 과제’를 안고 있는 학생들이고 지금은 ‘수업의 연장’이라는 본분을 자각하며 관찰의 자세에 임한다.

어느새 버스는 ‘자유로’를 달리고 있는데 바다를 둘러친 철책은 애써 우리의 ‘부자유’한 분단을 각인시키고 있었다. 서울의 끝자락에 붙은 우리학교에서 출발한지 겨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차창 밖은 검게 칠해진 구조물들과 철책선, 국방색 초소 등 군사적 긴장감이 조성된 다른 세계였다.

 임진강역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그야말로 지척이었다.

도라산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 임진각주변을 둘러보았다. 휴일이라서인지 관광객이 많았다. 조선족학교에서 온 듯 명찰을 목에 건 어린 학생 팀들도 많았고 외국인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4월의 고운 꽃들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느끼기 위해 줄을 선 알록달록한 사람들의 재잘거림 뒤에 전쟁의 흔적을 도구화한 ‘의도’들도 넘실거리는 듯 했다.  “김정일도 천안함처럼 두 동강내자” 라는 아이들에게 차마 보이기 뭣한 ‘대한민국 어버이연합’ 명의의 현수막은 이곳도 예외 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장례식 날, 서울역에 모여 확성기를 들고 규탄(?) 집회를 하던 ‘어버이연합’, 이분들의 다녀가심을 또 확인하며 착잡해진다. 한국전쟁의 공로(?)를 감사히 여겨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운 트루만 동상 주변으로 녹슨 전투 함대들도 ‘멸공’을 일깨워 각인시키는 듯 했다.

구조물 하나에도 관람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화와 통일의 성찰을 느끼게 할 것인지, ‘반공’에의 전의와 적대감을 키우게 될 것인지를 고민하는 책임 있는 기획이 필요할 것이다. 기획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고 전달되기 때문이다.


도라산 역으로 가기위해서는 임진강역에서 신분증을 제시하여 출입수속을 거친 후 패찰을 목에 걸어야 한다. 마치 ‘민족적 상징’을 의미(?)하는 듯 빛나는 흰 셔츠를 입고 온 우리의 반장이 모든 업무를 알아서 처리해주니 우리는 쫄래쫄래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지만 가끔은 반장을 잃어버려 ‘가이드 챙기자’는 비명을 지르게도 했다.

반장은 ‘개별행동을 하지 말라’ 는 잔소리도 해가면서 이날의 여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수행하였는데 나름 긴장했는가, 동동주의 과잉섭취로 얼굴이 앵두처럼 붉어진 채 도라산 역에서 진행된 교수님의 ‘번개강의’에 조교가 되어 탐방의 의미를 역설하기도 하였으니 리더의 길이란 외롭고도 장엄하다 할 것이다.


 임진강역, <평양 205km ↔ 서울 56km> 라고 표기된 푯말은 생경스러우면서도 마치 도봉역에서 방학역 향하는 듯 친밀감을 느끼게도 한다. 하지만 도봉역에서 방학역 가듯 할 수 없는 아득한 거리라는 현실이 착잡하게 했다. 그럼에도 ‘남쪽의 마지막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입니다’라는 글귀를 보며 출발역이 있으면 종착역은 지구의 끝까지라도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 한 자락 지닌다. 

역시 여행은 기차가 제 맛이다. 아직은 남쪽의 마지막역인 도라산 역까지 운행하는 기차를 타니 달리는 창가에 와 닿는 봄 햇살에, 아이처럼 부풀기도 했다. 이 짧은 기차구간은 민통선구역이다. 도라산 역에 도착하여 헌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안검색대를 통과하여 역에 대기해있는 셔틀버스를 타고 도라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에 서니 임진강줄기너머 아련히 개성이 보인다. 황량한 들판에 마주보고 펄럭이는 태극기와 인공기는 지리적 거리는 강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체감하는 간격은 아득한 거리로 갈라져 있다. 임진강의 허리를 가르는 휴전선 아래 묵묵히 굽이를 넘고 돌아 한강으로 이어지는 물줄기처럼 인간들의 마음도 자유롭고 넉넉하게 흘러갈 순 없는지... 좀 더 선명히 개성을 보려고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좁은 망원경렌즈의 방향을 회전시켜 보면서 렌즈처럼 조여 오는 답답함을 느낀다. 온 세상을 카드 한 장 소지하면 못 갈 곳이 없는 시대에 지척거리에서 이게 뭔 노릇인지..그리고 특별히 신기한 그 무엇도, 아름다운 절경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눈앞의 얕은 산과 그저 그런 건물들뿐인 개성을 좀 더 가까이 보려고 애쓰는 우리의 마음 밑바닥은 무엇인지.


도라산역에서 연계버스를 타는 순간 반장은 버스기사님으로 바뀌었다. 유치원생 확인하듯 일일이 숫자를 세고 “아기 구루마는 차에 놓고 내리세요.” 라며 유모차를 졸지에 구루마로 격하(?)해버리며 내리고 탈 때 마다 인원을 확인한다. 그럼에도 어디가나 대책 없이 딴 청피는 사람은 꼭 한사람쯤 있기 마련이다. 기사님이 미아 찾듯 찾아다니고 빨리 오라고 외치고 하여 뒤늦게 버스에 오른 사람의 면구스런 표정을 보는 것도 나름 여행의 맛이다. 다행히 우리 팀은 반장의 ‘개별행동금지’발언이 위력을 발하는지 매번 착실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DMZ 전시관이다. D, M, Z라는 알파벳 세 글자를 빨간색, 보라색, 녹색철모와 노란색 조화로 만들어 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그 의미가 뭔지는 잘 읽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기념사진들을 찍고 있었고 철모에 꽂힌 노란 꽃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들도 보였다. 이어서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맞이한 안내원을 따라 5분짜리 영상물을 관람했는데 마치 70년대 영화 상영 전에 관람해야했던 ‘대한뉴스’를 보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다음순서는 땅굴견학.

가방을 보관함에 넣고 헬멧을 쓴 후 곤도라 같은 기차를 타고 땅굴로 진입한다. 3600m라던가 아래로 아래로 7분여가량 내려간 후 질척거리는 동굴 속을 한 줄로 걸어 돌아 나와 다시 기차를 타고 올라온다. 땅굴 끝 지점은 군사분계선 170m 전까지였다. 이 굴을 파기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을지, 이런 행위를 통해 하려는 것, 이루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비감한 심정이었다. “김치나 저장하면 좋겠다.”는 내 농담에 ‘홍어를 삭히느니’, ‘젓갈을 삭히느니’ 여러 이야기들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배고플 시간이 된 것이다.

땅굴의 깊고 음습한 공간, 짧은 시간의 ‘막장’에서 나오면서도 희미하게 빛이 보이는 순간 숨결이 열리고 따스해지는데 탄광의 광부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노동을 하고 있는지를 잠깐 생각해보게도 했다. 그리고 내 한평생 살아오면서 키 작아서 유리한 적은 처음이라는 생각, 좁고 낮은 땅굴 안에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걷는 키 큰 사람이나 외국인들 속에서 나는 고개 들고 당당히 걸을 수 있었다. 


버스는 다시 점심을 먹기 위해 통일촌 으로 향했다. 장단콩으로 만든다는 된장찌개는 맛있었지만 관광지화 된 식당의 인심이 장단콩 처럼 투실해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요즘 물가가 너무 올라 식당에서 반찬 더 달라는 말하기 미안한 때이긴 하다.

이 마을의 논과 밭도 주변이 모두 철책으로 둘러 처져 있고 주변의 휑한 전봇대사이로 ‘민통선 땅 전문, 000-0000’ 이라는 현수막이 펄럭였다. 민통선 땅 전문이라? 민통선의 땅에 특별한 의미부여를 한 투기의 거북한 속살이 부조화하게 펄럭이는 현수막처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점심식사를 끝으로 탐방코스는 마무리되는 셈이다.

도라산역으로 되돌아왔는데 아뿔싸 한 친구가 식당에 가방을 두고 왔음을 뒤늦게 확인한다.

맛있게 밥 먹고, 밥보다 더 맛있는 동동주와 고운 학우들에 취한 탓 아닐런지? 술은 때로 이렇게 흥을 한껏 높여주고서는 대가를 요구하기도 하는 몹쓸 기호식품이기도 하다.

다행히 유모차를 ‘구루마’화한 기사님의 도움으로 가방은 그 친구의 품으로 되돌아왔고 탈 없이 귀가 길에 오를 수 있었다. 도라산에서 다음 역은 북쪽으로는 개성, 남쪽으로는 임진강으로 표기되어 있었지만 임진강역으로 되돌아만 갈 수 있는 ‘녹 슬은 기찻길’ 을 기차는 천천히 달렸다.


몇 년 전 판문점에 간적이 있다. 도라산 보다 훨씬 더 엄격한 수속을 거친 후 보안서약서 같은 것도 작성하고 들어가니 영화 <공동경비구역JSA> 에서의 장면 그대로 땅따먹기 놀이할 때처럼 금하나 그어놓고 서로 대치하고 서 있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 북한 군인을 숨소리도 들릴 것 같은 거리에서 멀뚱멀뚱 바라보며 말도 건네면 안 되고, 표정을 이상하게 지어도 안 되고, 사진을 찍어도 안 되고, 그렇게 ‘안 되고’ ‘안 되는’ 관계에서 오는 어색함으로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 어색하고 착잡했었다.

그때보다 남북관계는 더 경색된 상황에서 돌아 나올 수밖에 없는 도라산을 돌아오며 문득, 이날 반장이 준비한 간식이 영화 속 에서 이병헌과 신하균이 나눠먹던 쬬코파이였다는 생각에 실소한다. 쵸코파이 처럼 사람도 자연도 남북을 넘고, 경계를 넘어, 쫀득한 친밀감으로 스며들면 좋겠다. 




Posted by 공고지
 

  오래 전 나는 ‘주경야독’을 실천하는 노동자이면서 야학학생이었다.

지금은 고급학원이 몰려있는 부자동네가 된 곳, 그때는 뚝방을 끼고 판자촌이 밀집해있던 신정동과 목동의 ‘쪽박산’ 빈터에 대형천막을 치고 책상과 의자를 만들고 칠판하나 걸어놓은 교실에서 대학생들이 중등과정을 가르쳤다.

그들의 두툼한 책과 지성은 부러움이었고 비슷한 나이들(때론 더 적은 경우도)이었음에도 우리는 ‘어린’ 중학생이 되었다. 당시 명문대생이던 대학생 교사들은 사서 고생을 감수하는 헌신을 보여주었고 동년배정도들인데도 어찌 그리 의젓하던지... 언제나 그렇듯 가난한 동네에는 분란도 많았고 늘 부모들의 싸움과 주정, 폭력에 피폐해진 청소년들은 그래도 공부해보겠다고 저녁마다 지친 몸을 끌고 그 허허벌판에 모여들었고 알파벳을 외우고 시를 낭독하며 위로받고 꿈도 품었다.

그러나 시작할 때 60여명이던 야학생들은 그마저 계속 다닐 형편이 못되어 겨우 열두 명이 졸업했고 이어 2~3기까지 지속하다 이런저런 내외부적 환경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이미 저만치 달려가 있는 사람들을 아득히 먼 거리에 둔 우리들의 달리기는 시작되었고 강산이 몇 번 바뀐 세월을 건너 조우遭遇했다.


30여년 만인가? 야학학생과 대학생이었던 사람들이 모였다. 선생님들은 30여명, 야학학생들은 연락이 닿지 않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겨우 다섯 명이 참석했다. 모두 머리가 희끗거리는 만큼의 세월이 흘렀기에 이름을 말하고서야 ‘아’ 하고 확인되는 경우도 많았다.

선생님들의 명함은 화려했다. 모 지방 검사장, 변호사, 교수, 대기업임원.. 대충 다 그랬다.

우리는 지니는 명함도 없이, 아파트관리소장, 금형공장 노동자, 택시 운전사였다.

모두 몹시 반가웠지만, 많이 아프고 애틋하기도 했다. 자리를 불편해하는 친구를 보는 안쓰러움과 안타까움, 건널 수 없는 강처럼 아득한 차이, 기득권의 견고한 카르텔의 벽...

계급적 토대의 불평등은, 강산이 몇 번이 바뀌고 정권이 수차례 바뀌고, 목청껏 민주주의를 외쳤어도, 견고히 불평등했다.

이것이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사회의 틀이었다. 나는 입속으로 가만히 외쳤다. ‘틀을 깨야 해, 그래야 우리가 자존의 자유를 지닐 수 있어’

틀 깨기, 두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이 견고한 굴레를 깨고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의 빌리처럼 두 발로 땅을 박차고 하늘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돌아보면 스무 살도 채 되기 전에 노동운동의 전선에서 치열하게 뛰어다녔고 젊음을 온전히 올인 했다. 운동을 시작하는 결단은 ‘당연한’ 것이었고 운동을 그만두는 것은 엄청난 고민과 결단을 필요로 했던 그 시대 운동가의 삶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렇게 세상을 바꾸면 행복한 우리 모두의 미래가 올 거라고 믿었다. 징역살이를 하고 수배생활을 하고 최루탄가루가 범벅이 된 체 길거리를 달리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민주주의는 형성되는 듯하더니 다시 독재가 난무하고 권력이 공포로 국민을 길들이는 사회에서  여전히 시청 앞 잔디밭에 종이캡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며 허탈함이 밀려왔다.

나는 도대체 뭘 해왔던 것일까? 우리가 ‘타는 목마름으로’ 그리도 외쳤던 민주주의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의 생활, ‘우리’의 관계의 질과 일상이 달라지지 않는,  ‘사치품’처럼 민주주의는 그렇게 허망하고 쓸쓸한 이름으로 내 앞에 섰다.

죽어라 노동하고 죽어라 외쳤는데 성과의 단 열매는 언제나 내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죽어라 노동하고 죽어라 뛰는 방식이 아닌 그 무엇을 바라보아야했다. 그래서 남들이 아이 학원비라도 벌려고 식당 설거지라도 선택하는 동안에 나는 대학공부를 선택했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식의 버둥거림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즉 물질보다는 가치를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벌어도 모자랄” 판에 비싼 등록금을 지출하고 사는데도 오히려 나는 풍요로워졌고 먹던 만큼 먹고, 자고, 이상 없다. 생활이 더 나아지거나 나빠지지도 않았다.

결국 삶의 질은 선택의 문제라는 확인을 한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병들게 하는”, 하여 미래가 왔을 때는 죽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황새 쫓는 뱁새’로 평생을 허덕거릴 것이 아니라 룰을 바꾸는 것이 현명하다.


이제는 운동의 방식도 룰 바꾸기로 가야한다.

이를테면 80:20의 사회에서 80의 삶을 보장하는 논의를 넓히는 방식, 20의 것을 나눠달라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20%가 80%의 부를 독식할 수없는 제도를 만드는 것, 죽어라 일해서 자본의 소비유혹광고에 흡인되어 되 바치는 것이 아닌 80%가 주도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상품을 구매할 때 그 공장의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과 복지의 정도를 상품에 기재하게 하여 소비자가 그 정도에 따라 상품을 구매하는 방식(‘오르그 닷’이란 사회적 기업에서 미약하게나마 표기한다고 들었다), 도시와 농촌의 80%가 공유하는 생산과 소비의 공동체 늘리기 등.. 구호가 아닌 구체적인 생활운동이 필요할 것이다.


‘나’와 ‘우리’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 잠시, “빨리빨리” 의 속도를 늦추고 부드러운 운율에 엄청난 혁명적 도발을 담고 있는 존 레논의 ‘이매진’에 가만히 귀기울여보자고.

세상은 ‘꿈꾸는’ 자들에 의해 변화한다.

‘종교가 필요 없고 국경이 없고 소유가 없는 세상,

모든 부가 똑같이 분배되고 군대도 전쟁도 없이 하나 되는’ 세계의 통일,

비록 지금은 ‘몽상’ 같을지라도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꾼다면 그것은 현실이 될 것이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종교의 다름으로 차별받고 마녀사냥을 당하고 종교전쟁으로 죽어갔는가. 또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소유와 지배의 욕망으로 전쟁을 일으켰고 인간을 욕되게 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제 화폐의 족쇄에 묶인 노예처럼 비굴하거나 비루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를 넘어 화폐가 없는 세상, ‘위에는 하늘뿐’인 권력탈피의 세상, 자본의 무국적화가 의미하는 ‘세계화’ 가 아닌, 공동체적 세계화, 그는 감미로운 음정으로 온 세상을 향해 ‘소리 없는’깃발을 흔든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같이 꿈꾸자고.


50여 년 전 미국의 흑인목사 마틴 루터 킹도 외쳤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도 꿈꾸었다. ‘인간이 권력의 자비에 매달려 사는 사회가 아니라 공적인 생활의 중심에 있게 되는 새로운 사회’ 를..그래서 그는 외쳤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존 레논도, 마틴 루터 킹도, 게바라도 모두 ‘불가능한 꿈’을 꾸었기에 세상은 조금씩 그 꿈에 다가가고 있고, 오늘 또 우리의 꿈으로 남아있다. 일확천금이나 내 가족만 챙기는 이기적 욕망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더불어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공동체적 꿈이었다.


내게도 꿈이 있었다. 어린 날 아침햇살아래 노란 호박꽃과 순백의 박꽃이 별처럼 빛나던 산언덕에서 고운 자연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고, 동네 앞 냇가에서 여름 밤 펼쳐지던 가설극장의 노래 소리는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도회의 삶을 꿈꾸게도 했다.

그러나 어린 날의 소박했던 꿈은 크고 투박한 도시의 불빛들과 빌딩 속에서 잠식되어 버렸고, 내 작은 몸은 노동력이라는 이름의 상품이 되어버렸다. 그물망에 갇힌 물고기처럼, 파닥거릴수록 피로와 상처만 더해갔고 내 꿈은 가위눌린 악몽이 되어버렸다.

그런 순간순간에 ‘꿈꾸는 자’들이 내게 말해주었다. 혼자 꾸는 꿈은 악몽이 될 수 있지만 함께 꾸는 꿈은 희망이 될 수 있음을..내가 꾸는 꿈은, 소유와 탐욕에 젖어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소유와 탐욕이 아닌 삶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의 꿈과 함께 하고 있음을..그 세상이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조직해야겠지만, 꿈꾸는 사람들은 오늘 다시 나를 찾아와 나를 전율하게 하고, 벅차오르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보라 저기 꿈꾸는 자가 오고 있다.’

‘상상해 보세요. 천국이 따로 없는 세상을,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함께 공유하는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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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
 

<달려라 냇물아> <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 <슬픈 미나마타> 에 대한 감상.


        생명의 숨결에 귀 기울이기

       

 어린 시절 고향마을은 아침 해가 뜨면 노란 호박꽃과 순백의 박꽃이 별처럼 빛나던 산언덕 아래로 ‘빈지수’ 또는 ‘미리내’로 불렸던 강줄기를 따라 ‘냇물이 달리고’ 있었다. 여름밤이면 그 강에서 ‘가설극장’이 열렸고 강 아래위를 나누어 하루의 땀을 씻은 처녀총각들이 가설극장의 천막 앞으로 모여들었다 . ‘두견새 우는 사연’ ‘새벽길’ 등의 영화 포스터는 윤정희와 남정임 문희의  예쁜 얼굴을 신성일, 박노식 같은 잘생긴 배우들이 감싸고 있었다. 하늘엔 온갖 별자리들이 제 자리를 드러내며 반짝이고 반딧불이도 덩달아 춤을 추고 다녔다. 갈고 다듬으면 형형색색의 반찬이 되고 오곡밥도 되고 울타리도 되어 소꿉놀이를 풍성하게 했던 고운 자갈들. 곱돌을 주워 반반한 흙바닥에 줄을 그어 땅따먹기하며 놀게 해주던 강.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은어는 대낮의 별이 되어 강물위에서 반짝거렸고 모래무지와 꺽다리도 지천이었다. 방아깨비 두 마리를 머리 맞대어 콩닥콩닥 방아를 찧게 하고 수확이 끝난 논바닥에 하릴없이 툭툭 튀어 나오던 메뚜기는 어제만난 친구 같았다.

어느 해, 박정희의 ‘새마을’에 동원되어 노란 볏집을 이고 있던 지붕이 회색의 슬레이트로 바뀌고 윗동네에 기와공장이 들어오던 언젠가부터 강가에 찐득찐득한 검은흙이 쌓였고 젊은이들을 도시로 밀어 올렸다. 도시의 팍팍한 ‘공순이’가 힘겨워 고향을 찾을 때마다 고향의 산과 들은 조금씩 색깔을 잃어가더니 어느 새 강가는 수초로 뒤덮이고 고운 자갈은 근본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소꼽놀던 각시방도 신랑방도 사라지고 비오면 잠기던 돌다리는 자동차바퀴가 굴러가는 시멘트로 견고해진 강가에 앉고 보니 허전하고 아쉬워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거위라,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전에는 더러 보였는데 요샌 통 안이네.” 새까맣게 그을린 노인네가 혼잣말처럼 답했다. 그 눈동자가 듣고 보니 중요하고 재미있는 풍경을 하나 잃어버렸다“는 듯이 비어있었다...그의 텅 비어있는 눈동자 속에 ’거위가 보이던 세월‘이 뭉청 빠져버린 것’

이라고 썼던 최성각의 거위를 잃어버린 풍경에 대한 묘사가 나의 오랜 동심을 송두리째 끌어내었다. ‘텅비어버린’ 그의 눈동자처럼 은어떼가 반짝이던 세월이 ‘뭉청’ 빠져버린 허전함이 되살아나서 나도 ‘노인’처럼 심장에 뻥 구멍이 뚫리는 듯 허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허전함은‘내장 한 토막을 해부실에 남겨두고 화장터로 간’미나마타 마을의 ‘인간시계’ 센스케 노인의 쓸쓸한 죽음과도 이어진다.

그뿐인가,

“요즘 제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제비라고요? 서울 강남의 제비족을 말하는 게 아니라면, 흥부와 친했다 놀부에게 똥물먹인 그 제비요? 그러고 보니 요즘 많이 날라 다녀야 하는데, 통 보이지가 않네요. 언젠가 참새가 삼분의 일로 줄었다는 보도가 나오더니.... 다 환경변화 때문이겠죠?
라는 박병상의 글에서 해학적 슬픔으로 치밀어 오른다.


더구나 근래에는 강원도 경상도 심지어 서울 도심에까지 멧돼지가 출현한다. ‘불가피하게’ 총을 쏠 수밖에 없었다는 경찰의 발아래 처참하게 널부르져 있는 멧돼지의 사진이 화면을 채운다. 아나운서는 전문가를 연결하여 원인을 분석하고 한결같이 답변은 ‘서식처를 잃은 멧돼지가 먹이를 찾아 헤메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조치’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 와 <달려라 냇물아> 만 읽었다면, 이 글들에서 간곡하고도 따스한 언어로 들려주는 거위의 말을, 배추흰나비의 몸짓을, 짱뚱이의 하소를 귀담아 들었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 에서는 2007년부터 ‘고산준령이 그리운’ 그러나 고산준령으로 갈 길이 끊어진 멧돼지가 ‘자연의 재앙’(최성각) 인 인간의 도시에 출현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을 적고 있다. 이 책들을 읽은 후 ‘환경운동 하는 사람을 공산주의’ 보듯 하지는 않지만 환경문제에 무지한 나에게도 “흰둥아, 내 니똥을 군말 없이 치워 줄 테니 경찰아저씨들 눈에 띄지 말거래이. 띄면 죽는 수가 있단다.”며 흰둥이의 미래를 걱정했으나, 결국 마취 총에 죽은  ‘흰둥이의 짧고도 고독했던 일생’을 애도한 최성각의 심정이 찡하게 전해져온다.


언젠가 경제학 수업에서 교수님이 ppt를 사용하여 그림 하나를 보여주셨다. ‘오래 된 미래’가 출간되기 전의 티베트 같은 곳에서 저녁놀이 물드는 고요한 언덕길을 젊은 아낙이 물동이를 이고 걷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몇 학생에게 질문하셨다.“이 그림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 “평화로와 보인다.” “쓸쓸해 보인다.”등의 답변이었던가? 교수님은 대개 그렇게 답한다면서, 그런데 “평화로운 풍경의 이 삶을, 이 여성이 선택했을까요?”

경제학이나 수학 통계 등을 워낙 싫어하는 나로서는 그 수업이 뭘 설명하려고 한 것인지 맥락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 장면은 또렷이 남는다. 그 여성의 모습은 우리의 60-70년대 농촌에서 일상으로 볼 수 있던 풍경이었다. 질문도 남았다. 그 시절 과연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삶을 불행해했던가? 그리고 지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풍요(?)해져서 물동이를 이고 다닐 이유는 없지만 고운 저녁놀을 볼 여유도 없어진 시대에 행복한가?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었던가?

내가 읽은 세권의 책들은 “아니라” 고 답한다. 경제성장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밥 굶는 일도 없어졌고, 물동이를 이지 않아도 되고 강가의 얼음을 깨며 시린 손으로 손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솔직히 그립긴 하지만 그 배고픈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데.


청년시절 공장의 굴뚝과 최루가스가 뒤덮던 도시의 골목을 헤매며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거제도에 내려갔다가 아예 둥지를 틀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사유들로 몇 년 전 다시 수도권으로 올라오고 보니 즉각 나타난 것이 알레르기였다. 발작적인 알러지 증상으로 병원을 들락거리게 된 것이다. 기본체력이 튼튼하고 흡연으로 단련(?)되어서인지 남편은 괜찮은데 아이와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고생이다. 두 번째로는 너무 바빠졌다. 도무지 여유롭지가 않은 것이다. 약속이 생겨 시내 한번 나갔다 오려면 몇 번을 갈아타는 번거로움과 더불어 길에서만 꼬박 3~4시간이 걸린다. 이러니 바쁘고 피곤할 밖에.

세 번째는 경제적으로도 더 쪼들린다는 것이다. 우선 거제는 집값이 훨씬 저렴하다. 그런데 작지만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멀쩡한 집을 팔고 왔는데도 수도권변두리의 연립주택 전세도 안 나오는 것이다.

몸은 나빠지고 시간은 조이고 경제는 쪼들리는, 이것이 도시서민의 삶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어 살면서 동네골목까지 잠식해 들어오는 대기업슈퍼마켓의 엄청난 상품을 소비하며‘미친 듯’살고 있다. 무엇을 위해서?

결국 행복하자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거대한 시스템에 동화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밀려날까 두렵기에 컨베이어벨트의 나사를 조이며 기계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 찰리 채플린처럼 그렇게 허덕거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자본의 이윤 시스템 유지를 위한 발판이 되어있는 것, 내가 주도하여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주도에 의한 기계화 된 삶. 그렇게 우리시대의 사람들은 이미 자연이 아니라 기계화 되어있는 것 아닐까? 기계처럼 마음은 강팍해지고 배는 부른데 마음은 자꾸 공허해진다. 도시가 보이는 도봉산정상에 올라보면 내려다보이는 그 많은 아파트에 내 공간하나 없으니, 분양정보에 매달리고 간당거리는 비정규직의 삶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무엇으로 행복해질까?


<이것은 사라질 생명의 목록이 아니다>에서 박병상은 뻐꾸기 소리를 들어보라고 한다.

‘작지만 가장 멀리 나는’ 도요새를 바라보라고 한다. ‘가여운 직박구리’의 고단하게 자리한 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먼 길을 돌아서 걸어가 보라고도 귀띔한다. 정말 뻐꾸기 소리를 들어 본 게 언제였는지.. 안타깝게도“도요새, 도요새, 그 몸은 비록 작지만 도요새 도요새 가장높이 나는 새”라는 노래를 멋들어지게 잘 부르는 지인의 노래를 통해서나 그려 본 도요새는 점점 보기 어려워진다 한다.


 뻐꾸기와 도요새와 거위와 배추흰나비들이 사라져 버리는 세상일 때 인간의 모습이 어찌될지를 <슬픈 미나마타>의 이시무레 미치코는 ‘유리’처럼 된다고 증명해 보인다.


“나무에도 풀 한 포기에도 영혼은 있다고 나는 믿어요. 물고기에게도 지렁이에게도 영혼은 있다고 믿는데, 우리 유리한테는 그것이 없다니, 그게 말이 돼요?”


“시집와서 3년도 안돼 이런 희귀병에 걸리고 말았으니 애석타. 나 혼자서는 단추도 못 채워. 손도 몸도 이렇게 쉴 새 없이 떨리니. 머리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혼자 제 멋대로 떨린다니까.”


건강한 몸으로 바다를 좋아하며 소박하게 살았는데 공업자본의 비열한 이윤추구의 희생이 되어 슬프게 죽어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성장에 눈이 멀어 자연에 해악을 끼친다면 우리 모두‘슬픈 유키’가 될 수 있음을 예고한다. 보라 당장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신종질병들로 온 세상이 호들갑을 떨고 멀쩡한 인간의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지 않는가. 미나마타시의 총체적 살인현상을 담담하고도 나긋나긋한 언어로 증언하고 있는 이시무레 미치코의 서늘한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는다면, 수많은‘유리’와‘센스케노인’‘유키’들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최성각의 <길을 잃은 토건국가> 편에서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마르코스 부사령관과 인디오인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길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에는 뒤쪽을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될 거다...그것은 전에 어디에 있었는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기 위해서라네.”


가을의 끝자락에서 참 아름다운 글들을 읽었다.

 이 책들은 그 어떤 주장이나 구호보다 잔잔히 스며들었다. 사람의 이런저런 허물이나 양태가 아니라 자연과 생명에 대한 존중과 가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생명의 문제, 사람과 자연이 공존해야하는 환경의 문제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부터 과목을 편성하고 교육하여야 한다. 이런 책들을 읽고 토론하며 자란다면 아이들이 사람에게도 사물에게도 따뜻한 눈길을 나누고 오롯이 귀를 열어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귀를 기울여 가만히 들어보면 시내의 아스팔트를 방황하는 멧돼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신종플루니 조류독감이니 광우병이니 지구온난화니 하는 인류의 재앙조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들을 수 있을 것이고 해법을 위한 실천도 커질 것이다. 더불어 미나마타 마을의 ‘시계’였던  단정한 센스케노인이 “싹둑 잘려진 자신의 내장토막을 해부실에 남겨두고 화장터로 끌려가는 죽음”을 우리가 뒤따르는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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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이 죽어버린 선덕여왕이 재미가 덜해지긴 했지만 가야민의 ‘전위조직’인 ‘복야회’를 두고 가야출신인 유신과 선덕여왕 비담의 갈등들이 새로운 재미를 준다. 가야는 끌어안되 복야회를 끌어안을 수는 없는 선덕여왕, 신라에 복속됨으로써 가야민을 살리자는 현실적인유신.. 그리고 처절한 희생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혁명을 통해 가야의 독립을 꿈꾸는 복야회의 수장은 이렇게 갈등한다.

“신국(신라)이든, 가야든 가야의 백성들에게 무엇이 다를 것인가” (대사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의미)

그 대사를 들으며 바꿔 보았다. ‘미국이니 한국이니 하는 국가의 틀이 국민들에게는 무엇일까?’ 지켜야 할 그 무엇을 위해 우리는 비장한 언어로 ‘반미’를 외치거나 박지성이 다른 국가의 수비를 뚫고 공하나만 차 넣어도 아파트가 들썩거리도록 환호하는 것일까?

지나친 감정의 분출은 혹 열등감의 다른 표현은 아닐까?


열등감이란 가지지 말자고 하여 없어지는 감정이 아니다.

평생 열등감속에 사는 것이 인간일 것이다.

미국의 풍요로움과 강대함은 그 자체로 부러움이 되고 ‘그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느낌을 주기도 할 것이다.


 지금은 그래도 그렇게 비하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공장 노동자를 ‘공순이’라고 부르던 시절, 주눅이 들어 ‘나’를 드러내기 싫었다. 나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꾸 다른 곳으로 눈길이 향했었다. 그러나 ‘나’를 비로소 당당하게 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자각하고 내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부터였다.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나는 노동자다.” 라고 외치면서 비로소 가슴이 탁 터지던 자긍심을 지닐 수 있었다. 노동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이라는 스스로의 존재확인으로부터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듯 열등감은 나를 존중할 때 극복이 가능해진다. 


미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은 나라? 그래서 어떻다고? 김치 먹고 된장 먹고 마늘 먹는 우리의 발효식품 덕에 신종플루도 잘 안 걸리는 지혜로운 식생활을 지니고 있는, 좀 복작거리긴 하지만 또 따스하기도 한 사람들이 사는 곳 아닌가? 큰 나라, 부자인 나라,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데, 누구 때문에, 누구를 쫓아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니까.


또한 당당함은 나만 잘났다고 할 때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내게 당당하면서도 남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지닐 때 비로소 마음으로부터 당당해진다. 그래야 열등감도 없어진다. ‘반미’를 외친다고 ‘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나로부터 너에 이르기까지 속박이나 추종이 아닌 자유로움으로 열릴 때 열등감은 극복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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