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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26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
-1930년대 독일, 맑스주의가 있는데 감히 파시즘이?

히틀러 이전 독일에는 맑스주의가 두 눈 버젓이 뜨고 살아있음에도 파시즘은 점점 국제현상이 되어갔다. 계속되는 맑스주의 노동자운동의 실패가 국제적인 민족주의 강화로 메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맑스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은 아주 손쉬운 결론을 내릴것이다. "얼어죽을, 맑스주의는 무슨. 그거 말짱 꽝이야, 다 틀렸다고!"라고.
하지만 라이히는 바로 이 지점, 거듭된 실패에도 '여전히' 맑스주의가 정당하다는 것을 가정한 상태에서 노동자운동 실패의 원인을 찾으려했다. '이론은 분명옳다, 그러나 실천이 문제다'라는 식으로 대충 뭉개고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부터 이유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라이히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맑스주의자들의 정치적 대중선전은 객관적인 사회위기의 과정(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경제적무정부주의 등)만을 다루고 있었다는'것. 하지만 그 당시 모든 정치조직, 심지어 교회까지(그야말로 개나 소나) '물질의 결핍을 강조했기에 맑스주의자들이 주장한 물질결핍이 차별화되지 못했던  것이다. 즉 맑스주의적 정치는실천에서 대중들의 성격구조와 신비주의의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지금도 고려 안하고 있나? 흑흑)
라이히는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1933년 (이 책을 쓴 때)까지 맔스주의 이론과 실천을 추적한 뒤 맑스주의자들이 '객관'에 치우쳐 역사의 주관적 요인을 깊게 추적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슬프게도 새로운 역사적 현상(=파시즘)에 변증법적 유물론이 제대로 적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맑스에 따르면 근본적인 것은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는 것이다(흔히 급진이라 부르는 Radical 이 근본적인, 근원적인을 뜻하는 것과 같은 맥락! 스콧 니어링은 자신을 근본주의자로 불렀다.)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여 모순으로 가득 찬 과정을 파악하게 되면,확실히 반동을 극복하게 된다는 것이 맑스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사물의 근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기계론적 사고, 경제주의 또는 형이상학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비판은 사회적 실체의 모순이 어디에서 '간과'되고 있는가를 증명할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고 실천의 가치를 가질수 있다고 한 맑스의 말을 되짚어보면, 맑스주의자들이 간과한 모순이 라이히가 목 놓아 부르짖는 그 모순이다. 즉, '인간문제의 모든것을 실업자문제와 임금 문제에 국한시키는 경제주의'인 통속적 맑스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경제말고 '대중의 내면을 움직이는 감춰진 힘'. 라이히는 그것을 찾으려했다.

-노동자들은 왜 민주당이 아닌 한나라당을 지지하는가

대한민국의 1천만 노동자 가운데 대부분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독일 노동자들 또한 우파를 지지했다. 1928년에서 33년까지 독일사회의 경제. 이데올로기 구조(43~45쪽에 나오는 표)를 살펴보면, 실제정치는 경제적 분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분포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사회의 그릇된 구조를 뜯어고치려 떨쳐 일어나지 않는다. '도대체 뭣땀시?' 이데올로기 때문에.
 1929년 부터 1932년까지 독일경제가 급격히 안 좋아지는 동안 나치당은 엄청나게 발전했다.(1928년 80만 표-1930년 6백 4십만 표 -1032년 1천3백만 표 - 1933년 1천7백만 표)
이 가운데 1930년의 6백 4십만표 가운데 3백만표가 노동자였다. 노동자들은 당연히 노동자정당을 지지할 것이고, 또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맑스주의자들의 순진한 믿음은 보기좋게 배신당햇고, 그것은 2007년 대한민국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배신 드라마다.
결국 문제는 '무엇이 경제적 상황과 대중들의 심리 구조가 일치하지 못하게 방해하는가' 이다.
요컨데 대중들이 지닌 심리구조의 본질과 그것이 유래한 경제적 토대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우선 경제적 존재와 일반적인 사회적 존재를 도식적으로 완전히 분리하면서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의식은 경제적 존재에 전부, 그리고 직접 규정된다고 주장하는 통속적 맑스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라이히는 강조한다.
흔히 맑스주의의 뿌리라고 알고있는 '경제/이데올로기, 토대/상부구조' 라는 도식은 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경제에 의존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로 인해 경제발전이 이데올로기의 발전에 의존하고 있음을 놓치고 있다. 그당시 맑스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에서 경제적 모순을 찾지않고, 이데올로기를 역사적 힘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비맑스주의적인 심리학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수많은 대중들의 의식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거대한 물질적 힘이다! (멀리 갈것도 없다. 우리나라를 수십년동안 짓눌러 온 반공 이데올로기를 떠올려보자. 실체없는 유령같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이놈의 나라를 얼마나 알뜰하게 망쳐 왔는가를!)

-오오, 이데올로기 이 무시무시한 괴물!

이데올로기가 대중들의 감정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이 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떤 경로를 통하여 이런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의 질문의 답을 찾기전에 먼저 알아야 할 사실, 이데올로기는 그 사회의 경제적 과정을 반영할 뿐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구조에 경제적 과정을 고착시키는 기능도 한다는 것, 인간은 직접적으로 경제, 사회적 지위의 영향에, 간접적으로는 사회의 이데올로기 구조에 종속된다!
우리는 경제와 이데올로기 사이의 균열을 인식해야 한다. 경제상황은 곧바로 정치의식으로 바뀌지 않는다.(그랬다면 버얼써 세계혁명이 성공했게?) 또한 이데올로기는 경제보다 느리게 변한다. (보수 꼴통들이 정신차리는 것이 우리 집 앞마당에서 석유가 나오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균열에 따라 사회연구는 두 겹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즉, 경제는 사회경제학으로, 성격구조(의식)는 생체-심리학적으로.
사회경제학은 인간의 행위와 생각이 합리적이고 목표지향적일 경우에, 즉 욕구만족을 향해 움직이고 경제적 상황을  직접 반영할 때, 다시말해 비합리적일 때 사회경제학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지금 필요한 건 뭐? 심리학. 심리학을 모르거나 무시하면 파시즘을 정신이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히틀러도 정신병, 스탈린도 정신병, 박정희나 전두환도 모두 정신병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대중심리학이 사회경제학과 대림한다는 것이 아니다. 둘은 결코 적이 아니다. 사회경제적 상황과 모순되는 대중들의 비합리적 생각과 행동들은 더 오래전의 사회경제적 상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모든것들이 실은 사회적 억압으로 우리의 머리와 몸을 지배해 온 것은 아닐까? 따라서 우리가 지금 눈에 불을켜고 찾아야 할 것은 노동자들에게 사회적책임이 정말로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노동자의 책임의식을  발전을 가로막았는가이다.
 어느 정당이 정치를 잘못해서도 아니고, 파시즘이 마술과 환상으로 대중들을 집단 최면상태에 빠뜨린 것도 아니다. 노동자들은 (그리고 우리들은 )내부에 모순을 갖고있다. 보수냐 혁명이냐, 좌냐 우냐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가 아니라, 혁명적 태도를 만들어내는 사회 상황과 권위주의적 분위기 사이에서 미친 듯 심리적 갈등을 겪고있는 것이다. 이 모순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책임이 전쟁에 미친 몇몇 윗대가리들에게만 있는것이 아니라, 그 제국주의 노름을 눈감아주고 슬그머니 손을보탠 대중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경제와 이데올로기는 따로 또 같이 가야한다!

한 마디로,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노동하는 대중들이 기꺼이 제국주의의 꼭두각시가 되도록 변화시켰던 것이다. 모든 사회질서는 자신의 주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구조를 대중들속에 만들어낸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월드컵, 황우석, 심형래까지, 우리사회 곳곳에서 '때만 만나면 활활 타오르는 파시즘을 우리는 보고있지 않은가.
지배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지배계급이 품고 있는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다. 한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는 그 사회를 지탱하는 경제구조의 모순들이 종속된 대중들의 심리 구조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무시무시한 실체이다.(아아, 이 얼마나 감동적인 깨달음인지!)

- 그리고 그 뒤에 계속 이야기 될 내용들

대중들의 이 '비합리적인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 억압요인을 설명하기 위해 라이히는 "성경제학'이라는 개념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맑스의 사회학적 기반과 프로이트의 심리학적 기반에 함께 근거를 둔 사회적 성 경제학은 대중심리학이며 동시에 성사회학적이라는 것이 라이히의 설명. 인간의 이데올로기는 하루 이틀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 가족과 학교, 군대, 국가 등의 크고 작은 집단이 조직적이고 아주 치밀하게 '전통, 관습, 교육, 도덕,' 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작업이라는 것. 그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2장부터 펼쳐지니 우리 다 함께 고고싱~

*강의시간에 사용되었던 문건인데 저자가 누구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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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