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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11 강준만 칼럼 -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
  2. 2009.04.22 미네르바, 안단테, 망다린 1
강준만칼럼] 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
강준만칼럼
한겨레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난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김은경 감독의 독립영화 <뉴스페이퍼맨: 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을 보고 착잡했다. 그러다가 곧 “그래, 바로 이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김 감독의 탁월한 연출 능력 때문일까. 내게 이 영화는 신문 보급에 관한 영화로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모든 모순을 꿰뚫는 화살처럼 여겨졌다.

<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은 23년간 신문보급에 종사한 어느 신문지국장이 1억5000만원의 빚더미에 올라앉고, 개인파산 신청을 내기 위한 변호사 선임비용 180만원을 구하지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실화를 다룬 영화다. 그 신문지국장은 죽음으로 무엇에 항거하고자 했던 것인가?

<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이 알려주는 진실에 따르면, 일부 유력 신문과 보급소가 맺는 계약은 ‘노예계약’이다. 이 신문들이 평소 비분강개조로 보도·논평하는 사회 일각의 그 어떤 ‘노예계약’ 못지않게 악성이다. 왜 이 신문들의 정의로운 기자들은 자기 발밑은 보지 못하는 걸까?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린 건 관료주의 분업체제로 인한 ‘악(惡)의 평범성’이다. 기자들은 취재에 몰두하느라 신문지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기자만 그럴까? 아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그 어떤 악이 저질러진다 해도 모른척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걸 가능케 해주는 마법이 바로 관료주의 분업체제다.

최근 유력신문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보도에서 노 전 대통령과 그 일행이 저지른 ‘위선과
기만’에 대해 추상과 같은 비판을 퍼부었다. 옳은 일이며, 잘하는 일이라 믿는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이 신문들은 ‘위선과 기만’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보급소엔 ‘노예계약’을 강요
하면서, 오직 지면에서만 외쳐대는 ‘사회정의’가 무슨 소용인가. 노 전 대통령의 그런 행각에 대한
뜨거운 분노의 화살이 똑같이 자신들을 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하지 않는가?

나는 유력신문 기자들이 꼭 이 영화를 보길 권한다. 그들의 이성과 양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이건 아니다”라고 한마디만 해줘도 그런 불의는 순식간에 바로잡힐
수 있다. 악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우리 발밑에 있다.

한국언론재단의 조사 결과, 신문 구독률은 1996년 69.3%, 98년 64.5%, 2000년 58.9%, 2002년
53.0%, 2004년 48.3%, 2006년 40.0%, 2008년 34.6%로 지속적인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신문의 신뢰도도 90년 55.4%, 92년 46.2%, 98년 40.8%, 2000년 24.3%, 2006년 18.5%, 2008년
15.0%로 하락했다.

신문들의 절박한 위기감을 이해한다. 그러나 신문지국에 노예계약을 강요하고 살벌한 경품전쟁을
벌이는 걸로 신문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까? 오히려 스스로 신문의 몰락을 재촉하는 자해가
아닐까? 신문 전체의 공멸을 불러오는 출혈경쟁을 중단하고 신문협회 차원에서 품위있게 ‘신문
구독 캠페인’을 벌일 수는 없는 걸까? 우리 사회의 모든 공적기관들이 국민적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신문이 가장 신뢰받는 기관으로 우뚝 서는 게 신문을 살리는 최상의
방법이 아닐까?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신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방안도 모색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으로선 꿈같은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유력신문들이 <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을
신문사 내에서 상영하는 용단을 내려주길 소망한다. 신문이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제도로
다시 태어나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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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

미네르바는 무죄!!! 그들은 유죄!!!

법원이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박대성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허위라는 인식이 없었고,
공익을 해할 목적이 없었다’
고 했다.

아니다. 진실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공익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무죄다.
그렇다. 표현의 자유를 옥죄려 했던 자들, 이제 와서 고발하지 않았다고 발뺌하는 자들, 그들은
유죄다.
진실을 허위로 가로막으려했고, 공익을 사익으로 틀어막으려 했다. ‘미네르바’는
무죄고, 그들은 유죄다.

다시 미네르바

미네르바의 경제에 대한 글은 우리 사회에 미네르바 신드롬을 낳았다. 거시경제에 대한 예언은
적절했다. 하지만 서민의 생활금융컨설턴트 역할에 대해선 알려져 있지 않다. 동사무소 무료
시설 이용, 마트 할인 시간 안내, 공짜쿠폰활용방법 등 서민들이 비상경제체제 아래서 살아남기
위한 눈물겨운 방법들을 자상하게 소개하기도 했다.

금융위기에 대한 예언자적 사명, 산업은행이 인수하려던 미국 리먼 브라더스의 부실화에 대한
경고,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에 대한 논리적 비판과 객관적인 인식 등은 제대로 된 경제정보에
목말라 있는 국민들에게 ‘참언론’이었다.
그는 공고와 전문대를 졸업했고, 독학으로 경제학을 공부한, 일자리 없는 신세의 30대 남성이었다.



다시 안단테

2008년 4월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당돌한 글이 다움 아고라에 올랐다. 행정부의 대운하 정책
 및 영어몰입교육, 의료민영화 등의 추진으로 국민적 불안을 가중시켰다는 것이었다. 한달이 채
되지도 않아 무려 100만명이 서명했다. 민주공화국이라는 깃발 아래 10대 청소년들을 비롯한
시민들은 한손에는 촛불을 한손에는 ‘미친소 미친교육’이라는 현수막을 들게 했다. 이것이 바로
2008년 한반도를 뜨겁게 달군 촛불정국의 시작이었다.

나라가 국민의 건강을 제대로 지켜주지 않는다는 불신은 정부와 기성정치권력 전반에 대한 불신
으로 이어졌고, 만민공동회처럼 퍼져나오는 토론과 주장들은 우리 사회의 잠재력을 좀 더 다른
각도로 몰고 나갔다. 민주주의는 투표장에서의 투표행위라는 단 일회적 행위만으로 결코 완성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민들은 현장학습을 통해 확인했다. 그때 그 당돌한 글의 주인공은
‘서울도 아닌’ 경기도의 한 착실한 고등학생이었다.

다시 망다린 마르티농(Mandarine Martinon)

1990년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로 청소년의, 청소년에 의한 혁명적 시위가 발발했다. 주장은 간단
했다. 중등교육기관의 비위생과 안전 부재를 해결해달라는 것이었다. 10대들이 전면에 섰다.
이들은 시위를 통해 교육문제 해결을 위한 예산으로 45억 프랑을 투자하게 했다. 망다린
마르티농(Mandarine Martinon)
이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리옹(Lyon) 출신의 망다린은 노동자계층의 어려움에 공감했지만 수도 파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조국 프랑스와 정치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데 대해 격분했다. 그래서 그는 정치인들이란 아주 교활하며, 비밀스런 거래에 여념이 없는 음모가들이라고 비판하곤 했다.

평소 그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하지만 사회에 대해서는 분명한 공공성과 이상(ideal)을 가지고 있었다. 일정 수준의 국가의 역할을 옹호하면서도 평등, 민주주의, 국가의 억압에 대한 저항을 중요시 여기는 한 사람의 시민이었다. 그래서 그가 바랐던 유일한 소망은 “학교가 시험공장에서 ‘지낼만한 곳’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테오도르 젤딘, 인간의 내밀한 역사 100-104면. 도서출판 강)

미네르바, 안단테, 망다린의 시공을 뛰어넘는 공감

18년이라는 시간의 차이,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공간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정치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매우 미묘한 공감대가 포착된다.

첫째, 이상주의다.
어느 누구도 국가를 부정하진 않는다. 일정 수준의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 옹호하고 순종해왔다.
하지만 인간다운 삶을 원했다. 지나친 시장만능주의를 비판했다. 교육의 시장을 인정하면서도,
인간다운 삶을 목표로 하는 교육, 소통하는 교육, 인간다운 교육을 희망했다. 공공성과 공익에
대한 애정
이 있었다.

미네르바는 영장실질심사에서 “공익을 해할 목적이 아니라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글을
썼다”
고 했다. “약자를 위해 글을 썼다”고 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교과서주의자들이요, 이상주의
자들이다.

둘째,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이다.
안단테는 어느 인터뷰에서 “멍청한 정치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리고 “정신차리고 국민과
소통하길 원해서”
탄핵 서명을 시작했다고 했다. 정치인에 대한 반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유치원생들이 보기에도 부끄러운 짓을 정치인들이 많이 했다”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망다린도 그랬다. 정치인들은 교활하고 비밀스런 거래에 여념이 없는 음모론자들이라고 비판
했다. 정치인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전혀 매력이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미네르바는 스스로 서민경제컨설턴트를 자처한 셈이다.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경제정책은 이
나라에 없었다. 근본적으로 정치와 국가주의를 불신했다. 특히 한국경제를 ‘천민을 등쳐먹는
 경제’
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주체는 누구였을까.

셋째, 주변이 본질이었다.
학벌주의와 기득권주의에 물든 대한민국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미네르바는 고작 전문대 학벌
뿐이었고, 경제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이비였고, 더구나 무능한 실업자였다. 하지만 어떠한
 치우침도 없이 균형잡힌 정보를 바탕으로 오로지 공익을 위해 발언했다. 주변이 본질과 상통
했다.

안단테도 이른바 서울시민이 아니었다. 서울근교 신도시의 고등학생이었다. 도리어 도시 외곽의
 삶이 본질을 이해하고 기득권에 물든 중심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었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망다린도 그랬다. 파리가 아닌 리옹이었다. 지리적 소외를 넘어 국가의 주요의제에서 소외되는
 지역성, 학벌성, 계층성이 도리어 이들에게 비판의식을 불어넣었고, 그 비판의식이 공공성과
결합되면서 이들의 주장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거대한 흐름으로 나타났고, 나라를 흔들고 사회
를 새롭게 조직하는 거대한 물결이 됐다.

다시 공공성이다

국가주의에 찌든 대한민국에 개인은 없었다. 국가주의에 대한 반작용이 극단적 개인주의로 이어
지는 측면이 없잖아 있었다. 극단적 시장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결합되면서 우리 사회는 철저히
파편화되었고, 개인의 자유권 절대주의가 아닌, 개인의 사소유권 절대주의, 개인의 토지소유권
 절대주의 사회
가 되고 말았다.

사회계약에 기초한 나라는 철저히 개인의 토지소유권과 주권(株券)을 절대시 하는 헌정체제
로 변모하고 말았다. 공익과 공공성은 철저히 배격됐다. 공익과 공공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빨갱이가 되었다.

미네르바의 무죄판결은 우리 사회에서 공익과 공공성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방식으로 추구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신호다. 변곡점이다. 대전환이다.
세상은 이런 과정을 통해 결코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속도로 변하곤 한다.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적응시킨다. 하지만 비이성적인 사람은 고집스럽게 세상을
자신한테 적응시키려 한다. 그래서 모든 진보는 비이성적인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조지 버나드 쇼)”

미네르바의 무죄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http://www.e-sotong.com/blog/tb.asp?B_BNUMBER=04200900002033185503
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