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은 다감하다.
음악을 전공해서인지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살인적인 미소'로 기본적인 친화력을 지녔다.
그러나 당신이 마음에서 동의된 사람에게만 그렇다.(아니라고 생각되는 경우는 고집과 자존심 강한 분이다)
맨처음 각각 시민단체 실무책임자의 위치에서 그분을 만났을 때 우리는 회의석상에서 뭔가로(기억도 잘 안나는데)날카롭게 부딪쳤다.
그분은 막 '부임'해왔고 나는 나름 '텃세'를 부릴만한 세월이 있다고 믿고 건방지게도 그분의 '발상'이 지역사정을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라고 터부시했던 것 같다.
그 후 어차피 늘 만나야 될 입장인 우리는 또 공식자리에서 함께했고 어느 날은 뒷풀이를 통해 편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 사람은 공식자리보다 뒷풀이를 통해 알게된다)  많은 소통이 가능했고 '비슷한 과'라는 공감으로 '기운이 통하는' 몇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시민단체의 일은 순간순간 긴장을 요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매우 지난하여 심리적으로 지치기도 한다. 그런 과정과정들을 잘 극복하고 힘있게 추진할 수 있는 동력으로 우리의 우정은 기여했다. 또 다른 단체의 섬세한 여성한분과 삼총사처럼  세사람이 늘 함께, 때로는 틈내어 산행도 하고 밥도먹고 호프집에서 맥주도 한잔씩 하며 협력하고 바르게 가자고 다짐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분은 타고난 자상함으로 늘 배려하는 입장이었고 나는 늘 연장자이기도 한 그분께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먼 곳에서 손님이 왔을때 험한 밤길을 운전해주기도 했고 내가 힘겨워할때는  말한마디 하지않는 나를 묵묵히 지켜보며 술사주고 밥사주고 했던 분이기도 했다. 그분은 속이야기를 편안히 풀어놓고 나누는 분인데, 나는 입을 다무는 형이라(이러면 야속하다는 것 비로소 깨달았다) 밉기도 하셨을텐데 정말 무던한 분이었다.

내가 그곳을 떠나던 날, 이삿짐차가 움직이기 전 달려온 그분은 내 딸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 가기도 했다. 그 사람들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어렵던지..

내가 떠나 온 후 지역에서 그분은 단체내부의 문제로 매우 힘겨운 과정을 겪었다고 들었다. 그 후 외국의 업무를 맡아 몇년 다녀오시기도 한 그분을 서울에서 한번 뵙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운 업무에 전력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 제법 시간이 흘렀고 마침 지방에 갔던길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이분이 내이름 앞에서 잠시 헤메시는거다. "누구시라구요?"  "000 라니까요" 악을 썼다. 몇번의 반복 후 "아,000" 그분이 탄식했다. "세상에 내가 000를 잊다니.."
"요즘 일하면서 자주보는 사람중에 이름이 거의 비슷한 사람이 있어 그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목소리가 다르고 전화기에 번호도 안뜨고" (전화기 잃어버린후 등록안됨)..뭐 이런저런 상황..
확인 된 순간 바로 달려오겠다고 하셨지만 일행도있었고 거리도 멀어 사양하고 돌아오며 우습기도 하고 한편 쿵하게 머리를 치는 반성..

그분이 몹시 힘겨울 때 나는 그분께 아무 위로가 되지 못했다는 자책.
힘겨운 시간들을 다 보내고 그 단체에서의 기억들, 사람들까지 다 잊고 싶었던 그분의 마음, 더불어 그 주변의 사람들까지 잃어버린 전화기처럼 삭제해버렸던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설마 또 잊어버리신건 아니겠죠' 라고 메일 보냈더니 정겨운 답이왔다.
'그 날, (내가 전화했던 날)을 생각하면 아득하다고..치매뒤에 깨어나면 이럴것 같다'고..
잠시,'잊혀진 여인' (?)이 된 것은 가슴쓰리지만  그 분을 다시 재회하는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분의 전화기에 삭제되어 방치된 나는 내가 아쉬울때만 찾고 눈 앞만보고 달린 날 채찍하는 따끔한 각성과 성찰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상 > 내가 만난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우조선 노조 백순환씨  (0) 2012.07.18
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