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을 통해 보는 파시즘의 대중심리


                                           

‘노무현은 재앙’ 이라 했던 대중이 ‘부활하라’ 며 애통


대중은 참으로 복잡한 군상이다.

때로는 두려운 존재로, 때로는 심리적 동질감의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무심하고 냉정하다.

자칫, 대중의 집단적 시선에 잡히거나 매도되기 시작하면 사회적 삶의 기반이 휘청거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대중을 떠나거나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삶이 가능할까?

때로 관계에서 지치고 불편하고 성가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정작 고립된다는 것은 두려움이 되고 소속은 ‘안정’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대중 속에서, 대중이 되어, 대중들이 가는 방향으로 지향 없이 동조하고 동행한다.


지난 5월 29일 노무현전대통령의 노제가 열렸던 서울광장에 운집한 수십만의 대중 속에 나 도 한부분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된 무엇으로 그 뜨거운 볕 아래 앉아있었을까? 오백만이 넘는 인구가 조문행렬을 잇고 ‘부모 죽은 듯’ 슬퍼하고 애닲아 하는 동질성의 근원이 무엇일까?

그러나 풍선을 날리고 눈물을 흘리는 마음 한 켠에서 뜨거운 햇살과 배고픔은 현실적 감각으로 와 닿았고 산자의 현실적 삶을 위해 발 디딜 틈 없는 행렬을 비집고 지하도 입구까지 빠져 나오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이렇게 숨 막히는 상황이 바로 우리가 서있는 사회적 조건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이 길이 시원하게 뜷려 사람사이의 간격이 유지될 때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의 자유에도 좀 더 다가가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난해 촛불집회에서 대중은 희열을 느끼기도 했지만 좌절하기도 했다. 그 기억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통해 울분으로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집권기간 내내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어투나 ‘품위 없는 태도’를 물고 늘어지던 사람들도 많았고 조˙중˙동의 언설에 침묵하거나 동조했던 대중들이 이제 ‘우리의 노무현을 죽게 만든’ 그들을 향해 돌멩이를 날릴 태세를 취한다.

대중들 개개인이 무력해지도록 양육되면 지도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심리는 더 뚜렷이 나타나며 보호에 대한 아이와도 같은 욕구는 지도자와 하나가 된다는 감정의 형태로 더욱 위장된다.

지도자와 권위주의적 국가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 자신을 민족성과 민족의 방어자라고 생각하게 된다.1) 는 라이히의 말은 이런 것을 두고 말함인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불효를 한탄하는 자식들에게 내가 뭐랬느냐고 꾸중하는 듯한 유시민의 도드라짐도 그렇다.

“대통령 돌아가시고 나서 여러 신문들을 보며 다시 한번 끔찍했어요. 불과 1, 2주 전에 노무현이 없어져야 진보의 새로운 길이 열린다고 썼던 칼럼니스트가 그 손으로 수백만의 노무현으로 부활하라는 칼럼을 쓰고 있어요. 제가 이럴진대 당사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노무현 자체가 재앙이고 노무현이 있는 한 진보가 재기할 수 없다는 글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원망과 야속함이 담긴 것 같은 그의 이 냉소에서 나는 또 다른 ‘끔찍함’을 느끼기도 한다.

다음 토론방 아고라에는 ‘눈에는 눈이다’ ‘유시민은 꼭 대통령이 되어 쥐박이에게 되갚아 줘야한다.’ ‘쥐 덫 구함’ 등의 글이 숫하게 눈에 뛴다.

 ‘우리 편’ 아니면 ‘너네 편’ 이 되고 집단적으로 흥분하고 열광하는 어떤 지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서로가 ‘완장 찬 인민군’이 될 수도 있는 ‘끔찍함’ 같은 것... 이런 대중의 심리를 라이히가 말한 성적 억압의 표출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억압당한 성적욕망과 좌절의 내면화가 극단적 분노 표출로 드러내는 위악 같은 것이란 말인가.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의 슬픈 자의식과 냉소가 ‘품격에 맞지 않은’ 서민의 언어로 '품격' 있는 엘리트들과 집권 내내 싸우며 고뇌했던 정치지도자 한 사람을 잃게 된 것이리라. 노무현은 그야말로 대중파시즘의 희생자이다. 최고 권력자이면서도 권력이 억압으로 작동하지 않는 이율배반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의 꿈이 넘어야 할 벽은 죽음 저 너머에 있었던 걸까?


우리는 노무현에게 제왕적 권력행사를 원했던 것 아닐까?


우여곡절을 겪으며 풍운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우리사회의 보수 기득권 세력들은 참을 수 없어했다. 조 중 동으로 대표 되는 언론, 수구세력, 주류기득권은 합심하여 그를 몰아세우고 마녀사냥식 테러를 가했다. 그들은 잃어버린 권력 되찾기에 실패한 것도 참을 수 없었지만 그 상대가 노무현이었다는 사실을 못견뎌했다. 상고출신, 인맥도 학맥도 없는 비주류, ‘품격’도 없이 권좌에 앉아 감히 검찰개혁이니 언론개혁을 말하는 그가 가소롭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경멸해야 마땅할 서자출신 대하듯, 그들은 노무현을 봐줄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보수의 정체성을 강변하기 위해 끊임없이 트집 잡으며  ‘불편한 진실’ 을 제거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결국 권력을 잡았고 자기들이 겪었다고 생각하는 수모의 원한을 야비하게 되갚아준 것이다. 상처받은 주류의 기득권에 분노하는 파시즘이다.


그보다 안타까운 것은 진보세력의 이반이다.

‘정치권으로 갔다는 건 권력을 탐하는 변절로 규정하는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니’ 라는 한진중공업 노동운동가 김진숙의 고백처럼 애초에 선을 그은 후 바라보았던 이들로부터, 처음엔 박수치며 응원했다가 이라크 파병문제 등 진보의 지향성을 수용하지 못하면서 이반한  지지자들까지, 어쩌면 그를 둘러 싼 환경은 보수지도자들의 강고한 지지기반에 비해 훨씬 열악했다 할 것이다.

보수의 몰상식해 보이는 이기성 못지않게 진보의 상식도 이기적이었다.

‘진보’이기 때문에 늘 옳은 것이고 ‘진보’는 항상 정당하고 진보가 가는 길은 늘 모두가 가야 할 길이고 진보의 언어는 곧 민주니까 인정해야 하고.. 천하를 뒤바꿀듯 진보는 그렇게 오만하기도 했다. 진보의 파시즘이라 해야 하나? ‘우리안의 파시즘’인가? 노무현의 영전에서 통곡하는 ‘진보의 눈물’은 그래서 회한이 많다.

우리는 마음 한편에서 사실상 제왕적 권력을 원했던 것 아닐까? 민주주의적인 절차나 과정보다는 속 시원하게 밀어붙여 주기를 바라는..

따지고 보면 결국 한 사람의 지도자에게 해결사적 절대 권력을 기대한 것 아닌가. 인간의 한계 안에서 민주적 과정을 함께 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강한 힘이나 권위, 신비주의적 권능을 열망했다는 점에서 라이히가 말한 ‘파시즘의 대중심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 결심만하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한 구조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적 절차가 중요하고 속도보다는 과정이 요구된다. 권위주의나 지역주의를 청산하고 민주적이고 이성적인 가치를 추구하려 했던 노무현은 국가운영의 최고권좌에서 더욱 고독했을 것이다.

사실 작은 친목회에서도 민주적 토론과정은 중요하다. 만약 누군가 혼자 잘나서 일방적으로 모든 걸 처리하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기분은 나쁘고 결국 그의 주도대로 흘러 가 버린다. 반대로 내가 아무리 ‘정답’이고 ‘옳아도’ 내 의견을 접어야 할 때가 많고, 설득하든가 안 되면 양보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민주주의이고 독재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구조라는 기초적 상식을 모를 이가 없음에도 따로 노는 심리구조는 늘 잘난 누군가에 의해 의존하고 끌려간다. 그리고 그가 휘두르는 전횡을 기꺼이 감수하고 복종한다. 그가 강력한 카리스마와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시원하게 절대적 권능으로 밀고 가 주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도덕적 자질이나 절차적 정당성 같은 것 이전에 ‘경제만 살린다면’ 그가 누구여도 좋다는 식의 지난 대선결과도 결국 대중들의 이러한 비이성적 심리가 작동한 것이리라. 자기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 체 파시즘을 열망하는 대중의 심리, 그 대중이 바로 나 이다.


김남주를 비난하는 대중파시즘


한편 미래를 꿈꿀 수 없어진 현대 우리사회의 불안정한 상태에 대해서도 ‘불평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파시즘 문 열릴 수 있다’2) 는 진단들이 나온다. ‘지금과 같은 사회문화적 불평등이 지속된다면 10년 뒤엔 좌절과 포기심리가 확산되면서 현실 도피적이거나 민주적 가치를 부정하는 파괴적 흐름이 형성될 수 있고, 양극화의 증대에 직면한 대중의 일부가 제도정치를 부정하고 국가. 민족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불안을 우회하려할 경우 파시즘으로 가는 출구가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황인식이 안 되는 정부는 국세청 내부 고발자 파면 기소, ‘언소주’의 광고 불매운동 색출 등 ‘쳐 넣어’ 식의 막가파식 정치로 발작적 광기를 느끼게 한다.

어떤 이들은 이제 우리사회는 '노무현'과 '박정희'라는 두 갈래의 축으로 정치지평이 펼쳐질 것이라며 결연한 전의의 표정을 짓기도 한다. 라이히의 이론으로라면 어떤 상징에 신비주의적 권위를 부여하는 즉, ‘권위를 병적으로 갈망하는, 자유로워질 능력이 없는 신비적 대중들의 성격구조’로 기능하여 또 다른 파시즘의 작동을 예감하게도 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영화배우 김남주가 출산장려금 100만원을 수령한 것을 두고 네티즌들의 비난이 일어나기도 한다. 100억대의 재산을 가진 그녀가 100만원의 복지혜택을 받았다는 것이다. 가진 자는 무조건 내놓아야 한다는 식의 비이성적인 복지개념도 문제지만 문제의 본질을 잘 바라보지 못하고 말초적으로 휩쓸리는 군중심리가 씁쓸함을 느끼게도 한다. 출산장려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있는 국가적(?) 처지에서라도 축하할 일이지 그게 무슨 죄라고?


깨자! 새가 알에서 깨어나듯, ‘신경의 평형상태’ 깨트리기


라이히는 성의 자유로움은 행복감을 가지게 하고 행복한 감정은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고 본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여러 가지이고 반드시 성해방이 개혁의 토대로 작동한다는 것이 여전히 명쾌하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늘 ‘성적으로 만족해야 바깥일이 잘 된다’느니, ‘부부이혼의 주원인은 성적 트러블이라’느니 성과 관계된 많은 언설들을 들으며 살아오는 동안 그런 언설자체가 대중들의 의식으로 구조화 되고 내면화 된 것은 아닐까?

그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 왔다면 또 다른 형태의 구조화가 이루어졌을지도..

이를테면 남성의 성욕이나 여성의 성욕을 다르게 본다든지, 성기만이 오르가즘을 느끼게 한다든지 하는 것들도 ‘그래서’가 아니라 ‘그래야’하는 것으로, 사회정치적 맥락을 통해 구성되어 온 것 이라는 이론들도 설득력을 얻고 있지 않은가. 또한 성기중심적인 라이히의 분석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고 나 역시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세상엔 다양한 성적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있고 또 성기삽입만이 아닌 형태의 섹슈얼리티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이히와는 다른 지점에서 앤서니기든스는 성과 권력과의 밀접한 연관관계를 분석하면서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적관계들의 민주주의가 공적 영역의 민주주의를 담보하므로 관계 속에서 신체적 감정적 학대에서 벗어나 권력의 평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한 평등관계를 통해 개인이 자신의 사회활동 조건들을 결정하는데 관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친밀성의 구조변동’을 통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즉, 성적 억압도 사회적 억압이니, 억압적 사회질서가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질서로 바뀌면 사람들의 정신적 해방감과 행복은 평화의 동력이 된다고 말한 점에서 이들의 논리는 라이히와 일면 공통점을 지닌다고 보아진다.

따라서 라이히가 말하는 성적 억압이 주는 수치심이나 좌절의 심리적 연결이 유의미하고 경이롭기도 하지만, 성적 억압이 해소되고 성적으로 충만한 사람은 파시즘적 요인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인지에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성적관계의 민주적 자율이 민주주의의 기초라는 점으로 본다면 공감할 수 있겠다.

 아무튼 라이히는 사회를 민주적으로 개혁하려면 대중들의 성격구조와 신비주의로 발현되는 사회적 영향을 고려해야하고 이것이 없는 ‘실천’행위들은 실패라고 주장한다, 즉 정치개혁이 아니라 대중들의 성격을 바꾸어야 가능하다는 것, 그런데 성격과 의식은 다른가? 라이히가 말한 성격은 본성적 성품 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의식개조에 애써 온 진보진영의 ‘의식’은 이데올로기적 개념으로 치부되는지? ‘가치관’과도 다른 개념인 것 같고..

아무튼 성격 바꾸기의 핵심은 그간 성적억압으로 인해 구조화되어 온 ‘신경의 평형상태’를 깨트리고 자유롭고도 행복한 성적 자유를 획득해가는 것이고, 이것이 라이히가 제시하는 ‘성경제학’인 것 같다.



문제는 깨는 것, 헤르만헷세의 데미안처럼 ‘새도 알을 깨고’ 나와야 세상이 열리듯, 내 신경의 평형상태, 즉 ‘정상성’으로 ‘규범’으로 ‘질서’로 ‘도덕’으로 강제되어 유인촌의 망언처럼 ‘세뇌’ 되어 갇혀있는 내 본질의 자유로움을 밝은 세상에 당당히 사유할 수 있게 깨자 깨!   그러나 우리를 강제해 온 이 두꺼운 벽들을 깰 연장은 무엇으로?




참고도서: 빌헬름 라이히/황선길 옮김『파시즘의 대중심리』그린비

         앤서니 기든스/황정미 외 옮김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새물결 2003

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