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단상 2011. 3. 15. 15:31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어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으련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른 모습을 그린 <자화상>으로 유명하다.
귀를 자르면서까지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광기'를 처절하도록 솔직하게 표현했다.
'광기'의 순간, 어쩌면 인간은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일지도 모른다고 어떤 분은 말했다.

윤동주의 '사나이'처럼 사람은 물러서서 봐야 자신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바라보는 객관화된 자신의 모습은 ''병든수캐'같고,'부끄럽고' '미운'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몇방울의 피가 섞인 시'의 갈망과,우물속에 들어있는 달이 밝고, 구름 흐르고,
바람불고, 하늘이 펼쳐있어, 우리는 또 살아가는 것이리라.

심리상담학의 핵심은 '문제의 외부화'라고 한다.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의 어떤 의식을 끌어내어 말하고 쓰는 것,
그것이 '생애사적 글쓰기'이고 '치유의 글쓰기'이며
그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상처는 별이 되어' 빛나게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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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