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씨!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말아요.

이제 저 긴 철길을 따라 저 너머 다른 세상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곳이 어디일지, 우리가 무엇으로 만날지, 그 무엇도 알 수는 없지만, 내가 가엾은 당신, 기다릴게요.

우리 다시 만나, 그날의 강변으로 야유회가자고요. 당신은 카메라를 챙기세요. 나는 당신이 좋아했던 박하사탕 한 봉지 들고 보랏빛 들국화 옆에서 사진을 찍을 거예요. 당신은 이름 없는 들꽃을 마음껏 찍고 당신의 렌즈 안에 들꽃이 되어 나는 스무 살의 노래를 부를 거예요. ‘삶은 아름답다’고 노래할 거예요. ‘뭉툭하지만 착하게 생긴’당신의 손은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내 머리카락을 다듬어주겠지요. 당신의 착한 손은 그럴 때 빛나도록 아름다워요.

한 시절 당신의 손을 더럽혔던 세월은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퍼붓는 우박 같은 것이었어요. 피할 줄도 모르는 당신은 천형처럼 복종했고 동조했지요. 마치 용광로에 떨어져 뼛가루도 없이 사라져버린 노동자처럼, 시뻘건 불길이 당신을 삼켜버린 것이지요. 그 손을 사슬에 묶어 세상은 무슨 짓을 한건가요?


가리봉동 공단에서 당신이 좋아하던 박하사탕 한 봉지를 들고 당신을 면회 가던 날, 공단에도 봄바람이 불었어요. 늘 퀴퀴한 냄새가 박하사탕 향기를 삼켜버리던 공단의 골목길도 그날은 향긋한 것 같았지요. 제일 예쁜 원피스를 입고 아껴 둔 구두도 신었어요. 광주는 낯설었지만 당신이 있는 곳이라 정답게 느껴졌지요. 그런데 ‘비상’이라 면회가 안 된다는 거절에 얼마나 안타깝던지..되돌아 나오는 아쉬운 마음위에 군인트럭이 먼지를 덮어씌우더라고요. 휘파람을 불며 군가를 불러대던 그 트럭의 군인들 속에 설마 당신이 있을 줄이야.

‘긴급 출동’의 군홧발에 산산이 으깨져버린 박하사탕처럼 우리의 사랑이, 착한 손들이, 그렇게 으깨지고 있을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겠어요. 당신이 안타깝게 입속으로만 내 이름을 부르며, 피의 아수라로 향하고 있을 줄 그 누가 알았겠어요.

철로만 넘으면 따뜻한 집이 있는 어린 여학생이 당신의 손에 의해 비명도 못 지르고 죽어갈 줄을, 방향을 못 잡은 총알이 그렇게 무고한 삶들을 파괴한다는 것을 차마 몰랐지요. 우리는.


그해 오월, 피의 기억은 카메라를 들고 들꽃을 찍고 싶은 당신을 ‘걸리면 불지 않고는 못 배기는’ 잔혹한 고문경찰로 만들었어요.

당신의 손에는 정치폭력의 더러운 똥이 묻어나기 시작했고 ‘빠지지’않는 냄새로 배어들었어요. 그 착한 손에 폭력의 똥이라니요.

내 순정한 눈빛 안에서 당신은 위악을 부렸고 열손가락을 쫙 펼쳐 악취를 과시했어요. 좁은 고문실의 욕조와 두려움에 질린 대학생들의 머리를 움켜쥐는 당신에게 이제 들꽃을 담을 카메라 따위는 필요 없어졌지요.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 것은 카메라였는데 강제된 완장을 두르고 당신은 점점 포악해졌어요. 사냥한 짐승처럼 잔인하게 고문을 가한 후 떨고 있는 학생 옆에서 맛있게 자장면을 먹으며 저녁회식을 의논하고 아이학교이야기를 하는 당신은 이미 사람에 대한 예의를 포기했더라고요. 시들어 초라한 들꽃 한 송이도 그렇게 고이 어루만지던 당신이, 한 알의 박하사탕에도 마음을 읽던 당신이, 사람을 죽일 듯 패고 고문을 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자장면을 먹다니... 당신의 손이 더럽혀지던 날, 당신의 첫사랑도 결별했지요. 폭력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과 이별하게 하는 것이에요. 당신은 매일 손이 더러워지는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어깨를 걸치고 ‘흘러 흘러 무엇이 될까’ 라고 노래했어요. 노래가 아니라 절규하는 슬픈 군상들이었어요. ‘삶은 아름답다’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학생의 일기장에도 당신은 조소를 날렸지요. 삶이 아름답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아름다워야 할 인간의 삶을 더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 인생 요렇게 망쳐놓은 놈들 중에서 딱 한 놈만 죽일려니까 엄청 고민된다.”고, “내 인생 이렇게 조져놓은 놈들이 너무 많아서 그 한 놈을 못 고르겠다.” 고 당신은 고통스러워했어요.

그 많은 원한들 중 정말 당신의 인생을 ‘망쳐놓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당신이 그리도 한을 품은 이 세상을 먼저 떠나려는 내 병실에서 당신은 말했지요. “보세요, 박하사탕 옛날모양 그대로 있죠?” 라고...

박하사탕은 모양도 맛도 그대로인데 당신과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당신이 다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면 좋겠다는 내 마지막 소망마저 당신은 중고가게에서 단돈 4만원으로 바꿔버렸어요. 당신이 흥정까지 해서 받아 낸 4만원, 네 장의 지폐가 서글퍼서 더욱 당신이 가여워요.

당신은 다시 우리가 소풍갔던 강변을 찾았군요. 아직도 나는 당신의 손가락 렌즈 안에 담겨있어요. 꿈이었을까? ‘언젠가 와본 듯한’ 그 강변에 변함없이 한들거리는 보라색 들국화 옆에 누워 당신은 ‘이제 돌아가고 싶은’ 첫사랑의 날들로 가려고 해요. 철교위로 기차가 지나가네요. 당신의 뺨에 흐르는 고운 눈물 한 방울이 우리의 사랑을 되살려 줄까요?


한나 아렌트는 “성숙한 인민은 대중들처럼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행동에 정치적 책임을 진다” 고했고 또한 ‘어리석은 대중이 전체주의를 만든다. 국가의 비이성화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 개인의 책임이다. 아렌트는 대중, 선동집단, 인민을 철저히 구별했다...생각하지 않는 대중은 정치적 분위기에 휩쓸리기 쉽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쟁취하려는 선동집단은 대중을 동원하며 폭력을 행사하려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선동에 쉽사리 말려드는 대중은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획일화시키고, 획일화된 사회적 분위기는 언제든 전체주의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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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