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296건

  1. 2012.08.19 '버티는 삶' ....
  2. 2012.07.27 독서 -<제국의 부활>
  3. 2012.07.18 대우조선 노조 백순환씨
  4. 2012.05.11 삼양동사람들의 오월, 그날
  5. 2012.04.23 동주 이야기 두번째~

'버티는 삶' ....

공감 2012. 8. 19. 08:58

http://goo.gl/LyZOi

 

‘버티는 삶’ 투쟁 2000일, 콜트·콜텍 노동자들

글 장남수_원풍노조, <빼앗긴 일터> 등 집필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마친 콜트악기 노동조합 방종운 위원장의 부인 이쌍심(56세)씨의 눈은 피로에 젖어 있었다. 간병인 일을 한지 벌써 8년. 24시간 맞교대를 하고 나오면 잠을 자야 하는데 여름에는 방이 더워 잠들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대충 집안일을 하며 낮 시간을 버틴 후 저녁을 먹고 이른 잠을 청한다.


남편 회사가 ‘위장 폐업’을 한지 딱 2000일이 지났다. 3천만 원의 융자 빚이 남아있는 작은 빌라는 자칫하면 넘어갈 지경에 있고, 대학을 간신히 졸업한 두 자녀의 학자금 대출도 1천만 원 이상 남아있다. 사람들이 “그런 대학도 있었어?” 라고 말하는 대학을 졸업한 스물아홉 살 아들은 한 달에 실 수령액 80여 만 원을 받으며 일하고 있고,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스물여섯 살 딸도 도시락까지 들고 다니며 딱 아들만큼 받고 일하다 때려치운 채 우울해 하고 있다. 한창 청춘인 자식들이 연애도 결혼도 엄두를 못 낸다. 한쪽 창으로 밖에 바람을 받을 수 없는 작은 빌라, 그나마 쌓이는 빚으로 풍전등화가 된 집안은 낡은 선풍기 한 대만 돌고 있었다. 그 작은 공간 한쪽 벽에 콜트공장에서 남편이 받은 공로패 두개가 하얗게 먼지를 쓰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24시간을 일하고 나오면 손을 움직이기도 싫어서 집안정리가 안 된다고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만두고 싶은 순간들이 굴뚝같지만 버텨야 한다. 그녀가 병원에서 돌보는 환자는 6명, 환자 1명이 한 달에 80만 원의 간병비용을 병원에 내지만 이쌍심 씨에게 돌아오는 한 달 수입은 120만 원이다. 하루라도 결근하게 되면 일당이 빠진다. 그 돈으로 한 달에 10만 원씩의 원금을 포함한 융자 이자만도 50여 만 원이 나간다. 정말이지 소금반찬으로 밥 먹듯 그렇게 살아왔다. 남편이 제대로 일을 할 때만 해도 시댁의 제사를 둘째 아들인 방종운 위원장 집에서 지냈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어려워지면서 제사도 불가피하게 큰형님이 돌아가시고 없는 장조카 집으로 옮겼고 관계도 다 멀어졌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시댁 형제들과는 얼굴 본지도 오래 되었다. 원래 손이 큰 이쌍심 씨는 돈 걱정 없이 선물도 하고 베풀고 살고 싶지만 도리가 안 되니 관계도 불편하다. 친정 형제들은 모두 그냥저냥 어렵게들 살지만 우애가 좋다. 쌍심 씨가 시간이 없으니 그들이 가끔 찾아 와 준다.

남편은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데다 평생 노동조합 일에 미쳐 월급은 늘 반 토막이었다. 하도 사는 게 어려워 젊을 때는 많이 싸웠지만 이제는 원망마저 포기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버지를 이해하기엔 현실이 너무 버겁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속 안 썩였어요. 아빠가 속 썩였지.” 이쌍심 씨는 허탈하게 웃었다. 도대체 언제 해결이 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지만 이제는 습관처럼 익숙해지기도 했다. 대법원에서 해고가 부당하다고 판결 했는데도 꿈쩍도 않는 사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녀는 방법을 알 수가 없다.

지난 총선 때 이쌍심 씨는 투표도 하지 못했다. 아침 6시 반에 출근을 해서 다음 날 아침까지 24시간을 묶여 있어서 투표할 틈이 없었다. 투표하겠다고 지각을 할 수도 결근을 할 수도 없다. 올해 12월 대선? 그것도 가 봐야 안다. 그날이 마침 비번이면 가능하지만.

그러나 대통령을 바꾸면 달라질까? 누구로 바꾸면 어떻게 달라질까? 확신이 없다.
이쌍심 씨는 요즘은 성당에 나가면 부디 우리가족 건강하게만 해주십사고 기도한다. 건강마저 잃으면 버틸 수 없으니까.

이쌍심 씨가 아이들 건사하며 가계를 끌어가는 세월 동안 남편은 공장의 농성 텐트 안에서 찬바람 더운 바람 고스란히 받으며 버티고 있다.

2007년 4월, 경영악화를 이유로 부평공장 노동자를 하루아침에 내친 회사는 2007년 7월 이름만 다르게 되어있는 대전의 콜텍도 폐쇄했고, 2008년에는 국내에 남아있던 공장을 모두 폐쇄했다. 잘 나가던 회사를 차근차근 정리 한 것이다.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면서 인건비가 싼 해외공장으로 빼돌린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동안 세계 기타시장의 30%를 점유하게 된 콜트사장 박영호는 국내 120위 안에 드는 부를 거머쥐었다. 현재 인도네시아, 중국공장에서 기타를 생산하고 기타네트, 콜텍엠아이씨, 콜텍문화재단 등을 거느리며 ‘세계최고의 기타생산’ 업체라고 자랑한다.

지난 2012년 2월 23일, 대법원은 정리해고가 타당성이 없어 무효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회사는 복직은커녕, 대법원의 판결을 조롱하듯 판결한지 3개월이 지난 5월 31일자로 ‘2차 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재 해고를 단행했다. 방치해 두었던 공장 부지도 팔아치웠다. 그동안 장인(匠人)의 자부심으로 ‘세계 최고’의 기타를 만들어 회사를 성장시켰던 노동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책임감도 없는 오만한 사장의 태도에 노동자들은 절망했다. 방종운 위원장은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다가도 ‘억울해서’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장은 단 한 번이라도 돈 때문에 고민해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해진다.”는 그는, 사장이 지금 누리는 부를 누가 만들어 준 것인데 이렇게 속일 수 있느냐며 눈자위가 붉어졌다.


가동이 멈춰버린 콜트 · 콜텍 공장에 ‘문화연대’ 팀들이 찾아와 연대의 어깨를 걸었고, 몸으로 함께 하겠다는 예술인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공장 지붕에 토끼를 그리고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어두운 작업장에 갖가지 조형물을 만들었다. 노동자들이 만들었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함께 컵라면을 먹으며 연대하고 있다. 방종운 위원장은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고 말했다.

목 잘린 노동자 울화가 치밀어도
무릎 꿇지 않아야 삶의 터전 빼앗기지 않는다.
........중략

청솔 나무 깎아 다듬어서 기타를 만든 세월 접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 시작한 투쟁이
일 년이면 끝나겠지, 내년에는 꼭 끝낼 거야.
웃으면서 넘길 일도 티격태격 싸운 날들
우리의 속 새까맣게 태우고
비웃듯 또 한 번 잘려진 목 2천일을 맞는다.

방종운, <2천일을 맞이하여> 중에

 
   지난 7월 15일부터 25일까지는 ‘콜트 · 콜텍 노동자 사회적 문제해결촉구’ 행동 주간이었다. 야단법석 파티, 예술행동, 법률가단체 공동기자회견, <기타 이야기 상영> 공장 마당에서 열린 락페스티벌, ‘콜트 · 콜텍 해고 2, 000일 미사’등 많은 연대집회가 열렸다. 삼복더위에도 불구하고 땀 흘린 ‘연대’행사에서 기타를 만들면서도 기타를 쳐보지 못했던 노동자들이 기타를 배워 무대에 서기도 했다. 투쟁 2, 000일 행동 주간의 마지막 날, 문화제가 열린 공장 마당에는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이라는 노래가 깔리고 있었다. 장석천 사무장도 ‘투쟁이라기보다는 버티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칠 것 같은 이 세상’을 정신 줄 부여잡고 버티는 일, 어언 2, 000일이 지났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할까.



이쌍심 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삶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버티는 삶’

2009년 정리해고 이후 파업을 이끌었던 쌍용차노조지부장 한상균 씨는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영혼이 없는 노동자이기를 바랐다.”(『한겨레신문』, 2012, 8, 6 재인용)

그리고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추적자’에서 ‘유망한 대선후보’ 강동윤은 수레를 타고 가는 ‘국민’과 수레 아래 깔리는 ‘벌레’를 비유로 들어 말했다. “거대한 수레가 지나가려면 바퀴에 밟히는 벌레들은 어쩔 수 없다.”고. 드라마에서 극명하게 보여주었듯이 평범한 아이의 죽음 하나에 엄청난 정치적 권력이 작동하고 있고, 온 가족의 삶 하나하나, 숨 쉬는 것조차도 권력이 개입해 있는데 정작 가장 ‘좋은 정치’ 권력이 절박한 이쌍심 씨 같은 사람들이 정치내용을 결정하는 행위에서조차 부정되는 것, 이것이 우리사회의 현실이다. ‘영혼이 없거나’ ‘벌레’처럼 취급되며 칼끝 같은 삶에 대롱대롱 매달리듯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거부되는 사회는, 국가는 무엇일까?

몇 마디 말로도 모든 것을 짐작케 하는 이쌍심 씨와 헤어질 때 그녀는 필자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외로움과 서러움이 한달음에 손끝에 전해져, 삼복의 여름은 터질 것 같았다.

저작자 표시

'공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서 -<제국의 부활>  (0) 2012.07.27
동주 이야기 두번째~  (0) 2012.04.23
<나는 가수다>에 투영된 욕망  (0) 2011.04.14
스무살의 노동 OTL  (0) 2011.04.14
그들의 머리가 문제다  (0) 2011.04.14
Posted by 공고지

독서 -<제국의 부활>

공감 2012. 7. 27. 15:30

좋은 책이 나왔다.『제국의 부활』소준섭 지음- 도서출판 한울

가장 먼저 펼친 장은 -중국을 움직이는 ‘아래로부터의 힘- 편이었다.

1958년 중국의 ‘대약진운동’  전개이후 농촌마을 샤오강춘에서는 주민 120명중 67명이 굶어 죽었고 6가구는 대가 끊겼다. 그리고 78년 11월의 어느 밤 한 농민의 집에 샤오강춘 생산대장을 비롯한 18명의 농민들이 비밀리에 모여들었다. ‘낮고, 헐고, 비좁은, 이 보잘 것 없는 곳’에서 이들은 자식들의 공책을 찢어 손도장을 찍었다.

이 순간, 중국 현대사를 바꾸는 위대한 역사가 탄생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읽어 보시기를...


인민대표가 된 ‘민원왕’여성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71세 할머니 왕수룽(2011년 현재)이야기다.

그녀는 ‘복지부동’하는 공무원이나 국가기관을 상대로 끊임없이 문제를 지적하여 해결하게 하고 ‘피선거권’을 상기시켜 주민들의 주권의식을 각성시키고 결국 육순의 나이에 자신이 ‘촌관’이 되어 훌륭히 업무를 수행해낸다. ‘다루기 힘든 사람’인 이 여성의 사례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 여성의 자각이 역사를 움직이는...중략....역사는 대중이 창조해 가는 것이다. 특히 ‘깨어있는 대중’은 역사를 크게 진보시킨다. 동시에 우리가 눈여겨 볼 점은 중국사회가 그러한 ‘민의’를 결국 체제 내에 수용해내는 시스템과 정신을 일정하게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아래로부터의 힘’의 반영수준이 민주주의의 척도”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현대판 포청천’ 이야기 등 재미있는 사례를 소개하고 있고 “좋지 못한 군중은 없으며, 다만 좋지 못한 지도자가 있을 뿐” 임을 보여준다.


나는 이 장이 너무 재미있어 얼른 눈이 갔지만 우리에게 ‘모호한’ 중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관계할 것인지 공부하고 싶다면 매우 유익한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공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티는 삶' ....  (0) 2012.08.19
동주 이야기 두번째~  (0) 2012.04.23
<나는 가수다>에 투영된 욕망  (0) 2011.04.14
스무살의 노동 OTL  (0) 2011.04.14
그들의 머리가 문제다  (0) 2011.04.14
Posted by 공고지

http://goo.gl/Qapyo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깃발이었던 대우조선노조 백순환

글 장남수 (원풍노조, <빼앗긴 일터> 등 집필)


“참으로 긴 굴종과 침묵이었다. 인간이기를 거부당한 사람들의 기계적인 행진이었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그렇게 긴 세월 이어져 온 체념과 절망, 그 아득한 무기력…… 그러나 절망의 끝에서 부여잡은 삶의 집념은 뇌성벽력과도 같이 우리 삶을 강타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기계일 수 없었다.
노동자! 그 찬란하게 빛나는 이름 앞에서.”
- 92년, 대우조선노동조합 발행 사진 자료집에서


1987년 그 뜨겁던 여름에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해’ 잠시 기계를 끄고 깃발을 들었다. ‘노동조합결성’ ‘기본급 12만원 인상하라’ ‘김우중은 각성하라’……깃발들 사이로 ‘전태일 열사정신을 계승하자’도 펄럭였다.

대우조선이 위치한 옥포와 장승포일대의 주택가 창문이 열리고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도 함께 펄럭였다. 그리고 쏟아지는 최루탄 연기 속에 스물한 살 노동자 이석규가 쓰러졌다. 그의 장례식을 치르고자 참석했던 이소선 어머니를 비롯한 민주인사들이 ‘제3자 개입’이라는 죄(?)명으로 야산으로 쫓기거나 구속되었다.

당시 스물여덟의 노동자 백순환(53세)은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늙은 노동자’가 되어 여전히 그 현장에서 노동하고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25주년이 되는 여름, 옥포에서 그를 만났다.

고 이석규 열사를 추모하며 시위농성투쟁을 벌이는 목포대우조선소 노동자들(1987)


25년이 지난 지금 대우조선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무엇을 이루었으며 혹 잃어버린 그 무엇도 있을까?

우선, 대우조선 노동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그때는 2년을 잘 못 버텼는데…… 87년 이전에는, 방위산업체에 대한 임시특례법에 따라 5년 근무하면 군 면제가 되는 기간만 견디려던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대우조선 ‘정규직 노동자’가 꿈이 된 젊은이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더불어 87년 노동자투쟁은 노동자들의 정치 경제적 조건만 올린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경제적 토대를 강화시켰다. 대우조선의 경우만 해도 87년 전까지 집 전화기를 가진 경우도 많지 않았다. 나도 5만원짜리 셋방에 살았다. 투쟁을 통해 절대로 올려주면 안 될 것 같았던 임금이 올라가면서 내수의 바탕이 되었고 집안에 금성, 아남 등의 전자제품이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부터는 자동차산업의 내수시장 기반이 되었다. 경차로 시작해 조금씩 배기량이 커진 차로 바뀌어왔다. 건설 경기가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증권시장도 성장했다. 87년 노동자투쟁을 평가하는 논자들은 일반적으로 당시 노동자 투쟁이 만들어낸 경제적 의미를 잘 해석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요즘 현장에서 나이 든 노동자들이 젊은 친구들한테 ‘너희들 행복한 줄 알아라.’ 라는 말을 한다. 무엇보다 결혼하기 좋은 조건이 된 것이다. 87년 전에는 거짓말하기 싫어서 선을 안 봤다. 현장 용접사나 취부사라고 말만하면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사무직 직원만 선호했다. 이제는 대우조선 정규직이라고 하면 두말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잃은 것이 왜 없겠는가, 무엇보다 사람 냄새가 사라졌다.
‘텍사코 쟈켓’(텍사코라는 석유회사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바다에서 유전을 발견하면 220 미터짜리의 대형구조물 네 개를 세우는데 그 형태를 칭하는 것) 이라는 고난도의 작업을 하던 기억이 많이 난다. 밤새 그 작업을 하고 아침에 헤어질 때 막걸리 나누며 서로 툭툭 어깨 치며 격려했다. 족구도 많이 하고 끈끈했던 기억이 이제는 아련하다. 지금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말을 별로 안한다. 휴식 때나 퇴근길에 전부 각자 핸드폰 들고 있다. 그때는 일을 해도 어울려서 분담해야 가능했는데 지금은 아쉬운 게 없으니까.

이석규씨 운구차량 모습(1987)


 그러나 그것은 정규직의 경우이고 대우조선 안에서도 비정규직은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현재 정규직은 1만3천여 명, 비정규직은 1만7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비정규직이 더 많아진 것이다. 87년 이전에는 외주,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노동 강도는 좀 셌지만 돈을 더 받았다. 그 예로 입사동기가 백 삼십 명인데 협력업체로 간 경우가 많았으니까.

지금 비정규직 문제는 가장 마음을 무겁게 하는 문제임에 틀림없고 어떻게든 간극을 좁혀나가야 한다. 지도부가 현명하게 해야 하는데 이를테면 단체협상 때 정규직은 복지수준을 조금 높이면서 비정규직의 임금을 올린다든가, 정규직이 성과급을 일정량 양보해서 비정규직으로 돌린다든가 해야 하는데 쉬운 문제는 아니다. 휴가, 명절선물, 성과급 100프로 동일지급 등을 단체협상 안건으로 내기도 하고 유인물 등을 통해 교육은 계속 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지금까지 운동하면서 가장 자부심을 느낀 경우는?

당연히 노동조합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노조위원장도 맡았고 금속노조간부로 파견되어 일도 했고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여 일하는 25년 동안 그 무엇도 혼자 결정한 적이 없다. 늘 토론을 통해 중지를 모아 결정했다. 대우조선 노동자가 되어 일한 삶이 자랑스럽다.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안 가길(못 간 것이)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적응력이 빠르니까 학생운동 하느라 매일 데모했을수도 있지만 대우조선 노동자로서 느끼고 실천한 내용만큼 삶을 진지하게 만들지는 못했을 거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국제시장의 직물점포에 취직을 했는데 교과서에서 배운 데로 하다가 잘렸다. 손님한테 거짓말하면 안 되잖아, 사장이 자꾸 속이는데 말 안하면 비겁한 것 같아서……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얘기 여러 번 들었지만 계속 그러니까 그만두라더라.

공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가?

아, 얼마 전 방통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인생의 한 굽이를 돌아 만학도로 하게 된 공부는 매우 유익했다. 많은 정리가 되더라.

혹 종교는?

87년 노동조합결성당시에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도망 다니면서도 수녀원에서 신세를 졌고 최은석, 최재춘 동지 등도 가톨릭 신자였기에 그때 영세를 받았다. 그 후 정신없이 살았고 서울 금속노조에 파견되어 부위원장, 금속산업연맹 부위원장 등을 하며 9년을 일한 후 2005년 거제현장으로 다시 복귀하면서 ‘내가 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많이 했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라 할까, 그리고 25년 만에 견진성사를 받았다. 나는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 민중과 부대끼며 평등하게 산 예수의 인간적(?) 삶에 감화를 많이 받았다.

금속연맹에서 기억에 남는 일은?

금속산별추진위원장을 맡아 지금의 금속노조를 만드는 씨앗 역할을 했다. 당시 외국에서 보기에도 한국에서 산별은 쉽지 않겠다는 말을 했었는데 가능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작 대우조선노조는 금속노조로 전환하지 못했다. 세 번이나 투표에 부쳐졌지만 세 번 다 3분의 2를 득하지 못했다.

파견근무관계로 가족들과 떨어진 기간도 많은데 가정에서는 어떤가?

90년 1월에 결혼한 후 8월에 노조위원장을 맡았고 그 해에 구속이 되었다. 아내가 강릉교도소까지 면회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요즘 빨래하고 청소하고 잘 한다. 우리마누라는 열흘이 돼도 절대 빨래 안 갠다.(웃음) 내가 걷어서 다 갠다. 음식물쓰레기 버리고, 애들 옷 늘어 논 것도 다 치우고, 잔소리하는 것도 내 몫이다. 미안하니까.

아들이 어릴 때 아빠 뭐하느냐고 누가 물으면 “금속 연맹한다.”고 말은 하더라만 내가 살아 온 삶을 자식들이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대화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고 그게 늘 아쉽다. 내가 추구해온 것은 귀한 가치인데 자식이 그걸 알아줬으면 싶은데 설명하기가 어렵다.


백순환 씨의 인상은 마치 하회탈 같다. 선한 얼굴이다. 그러나 그의 심지가 얼마나 굳고 강인한지는 그가 살아 온 인생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자식들에게 말하고 싶은 자신의 삶과 가치는 어느 만큼의 무게일까. 지면이 짧아 안타깝다. 필자는 그에게 글을 쓰라고 권했다. 몸으로 살아 온 삶을 이제 글로 다 적어 내라고. 필자는 약속을 촉구하며 잔을 들었고 그는 말없이 잔을 부딪쳤지만 언젠가 그의 이야기가 세상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질문도 답변도 축약한 채 인터뷰를 접었다. 조선경기의 추락으로 근심이 내재한 옥포 밤바다에서 석유시추선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단상 > 내가 만난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삭제된 기억'의 의미  (0) 2009.04.08
Posted by 공고지
Posted by 공고지

동주 이야기 두번째~

공감 2012. 4. 23. 07:28

'공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티는 삶' ....  (0) 2012.08.19
독서 -<제국의 부활>  (0) 2012.07.27
<나는 가수다>에 투영된 욕망  (0) 2011.04.14
스무살의 노동 OTL  (0) 2011.04.14
그들의 머리가 문제다  (0) 2011.04.14
Posted by 공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