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의 경쟁지상교육이 남긴 것

김동춘 / 성공회대 교수


최근 세간의 인기를 끈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정상급 가수들이 탈락하지 않기 위해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열창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 "경쟁이라는 것이 정말 무섭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기성과 신예 가리지 않고 가수들이 동등한 조건에서 피 말리는 경쟁을 하도록 상황을 설정하기 때문에 우리 대중이 좋은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된 것 아닌가라고 그 긍정적 측면도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모든 경쟁이 선일까? 개인의 재능과 열정만으로 음악 소비자에게 곧바로 평가받을 수 있는 자유경쟁시장과 대학의 교육과 학문, 특히 장차 국가의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같은 것일까? 한국 최고 명문 KAIST의 청춘들이 과도한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두고 드는 질문이다. '공부하는 학생, 연구하는 교수'를 만들겠다는 서남표 총장 식의 '개혁' 취지는 좋았다. 영국 《더 타임스》의 세계대학평가에서 2005년 232위였던 KAIST가 2009년엔 69위로 뛰어올랐고 연구비 수주액도 늘었으며 건물도 속속 들어섰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의 '개혁' 이후 4명의 학생은 죽음을 선택했고, 남은 학생들도 극히 불행한 상태에 있다.


충격과 불행 몰고 온 '개혁'


하지만 온 나라가 이 문제로 들끓고 비판이 사방에서 비등해도 정작 그는 "이 세상엔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며 "경쟁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항상 이길 수는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한술 더 떠서 그는 "외국대학도 KAIST의 개혁적 제도를 따르는 곳이 있다" "압박 없이 사회가 발전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은 너무 나약해서 그렇다"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KAIST의 대학순위 향상이 한국 과학기술 발전을 의미하는 것일까? 교수의 논문편수 증대가 국제적 대학으로 발돋움하는 증거일까? 영어강의가 학생의 실력을 국제수준으로 높여줄까?


접어넣기

지난번 그의 재임이 논란이 되었을 때 "서총장의 개혁이 결실을 못 거둔 채 중도하차하면 앞으로 또 언제 대학개혁을 실천하는 총장이 나올지 걱정이다"라고 앞장서서 그를 옹호했던 《조선일보》는 이 사건 이후에도 "서남표 개혁, 이대로 좌초하나"라고 온몸으로 사방의 비판에 맞서고 있는데, 여전히 '갈등조정의 실패'로 상황을 진단하고 제도적 보완을 하라는 정도의 제안을 하고 있다. 심지어 《동아일보》는 외국대학에도 자살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뭐 그리 야단이냐는 식으로 이 사건을 축소하려 한다.


서울대의 한 교수는 "이분의 머릿속을 의심한다"라고 지적했다는데, 나는 서남표 총장을 비롯해 그를 적극 옹호하는 보수언론, 그리고 "학점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화해서 부담을 주면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할 것"이라는 확신하에서 그러한 정책을 밀어붙이는 우리 시대의 우상이자 신흥종교, 즉 시장근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그 '머리'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통령부터 대기업의 오너, 일반 대중이나 학생들의 머릿속에 언제부터인지 이러한 신앙이 자리잡았기 때문에 매년 수백명의 대학생과 중고등학생이 자살의 길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천재를 범재로 만들어버린 학점경쟁


KAIST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학점이 3.0 이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경쟁은 그들을 학점기계로 만들었을지언정 결코 발랄한 과학도로 만들지 않았다. 학점기계가 된 학생들은 편한 과목만 골라들으려 하고, 인접 과목에 대한 관심을 접고, 동아리 활동을 전폐하고, 스스로 탐구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렇게 입학 때 재기발랄하던 천재 청년은 졸업이 가까워오면 공부에 흥미를 상실한 범재가 되어버린다.


사실 대학과 학계에서 오랫동안 몸담은 내 입장에서 보면 구태여 KASIT 학생들의 이야기 듣지 않아도 이러한 정책이 가져올 결과가 너무 분명해 보인다. 성취에 대한 격려가 아니라 탈락자의 낙인을 피하기 위한 학점경쟁 하에서 학점이 좋다고 해서 '점심값 치를 자격'을 얻는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런 학생들이 장차 국가의 과학기술을 짊어질 인재가 될지도 불투명하다.  해외저널에 실린 논문 편수가 많은 것은 교수가 열심히 연구한다는 외형적 지표는 되지만 그 분야의 탁월한 교육자 혹은 학자라는 보증을 해주기는 어렵고, 100% 영어강의가 학생을 국제적 표준으로 올려놓을 것 같지도 않다. 사실 이것은 KAIST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대학의 전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 대학의 치열한 경쟁과 질적인 우수성에 감탄했을 서남표 총장은 그동안 미국 물 먹고 압도된 나머지 그것을 씨스템에 대한 고려 없이 직수입하여 적용하려 한 한국의 시장주의자들이 갖는 허점을 그대로 반복한 것 같다. 미국의 시장주의는 비록 힘과 돈이 있는 자라도 조직이나 개인이 반칙을 하면 엄한 처벌을 하는 시장주의이며, 탈락한 자도 재기할 기회를 얻거나 약간 못한 곳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탄력있는 시장주의이다. 또한 아직 자유롭게 사고할 단계인 초중등학교 학생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경쟁논리를 적용하는 시장주의는 아니며, 주립대학 제도처럼 기초분야에 국가의 지원이 전제된 시장주의다. 그가 이 점을 알고 있을까?


KAIST가 미국 MIT와 다른 점


그런데 한국은 어떠한가? 기업의 세계에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고, 조직에 들어가면 학벌이 실력을 압도하며, 돈 되는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기초과학 연구하겠다는 사람은 바보취급을 받으며, 이미 십년 이상의 과도한 경쟁에 극도로 지쳐 있는, 인문학적 감성이 극히 취약한 대학생들이 있는 곳이 한국이다.


더구나 KAIST는 서남표 총장이 다닌 미국의 MIT가 아니다. 우리 학생들은 결코 MIT 학생들과 같은 조건에 있지 않다. 대기업이 기초과학에 거의 투자하지 않는 한국에서 KAIST는 국가의 과학기술 미래를 짊어져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으며, 따라서 돈 잘 버는 직업을 포기하고 온 학생과 교수에게 자긍심과 만족감을 심어줄 때에야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설립 취지 자체가 전액 장학금으로 국가를 위해 일할 과학도를 기르자는 곳이고, 각자의 조건과 소질에 맞는 영재교육을 실시해야 하는 곳이고, 못 따라가는 학생에게도 '금전'적 징벌보다는 엄격한 졸업심사를 적용해야 하는 곳이다.


모든 학문적 성취가 그러하지만, 과학발전은 결코 학점경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점 기계들이 우리 과학기술과 국가발전의 미래를 짊어질 수 있을까? 더구나 의대나 한의대에  과학영재가 몰려가는 세태에서 KAIST에 들어온 학생들을 크게 격려해주고 칭찬해주어야 마땅하고, 영어를 못하거나 적응을 못해서 탈락할 위기에 몰리더라도 교육과정에 더욱 많이 투자해서 그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경쟁지상과 시장만능의 신앙을 버려라


물론 서남표 총장 자신은 경쟁의 무풍지대에 있으면서 약자에게 무한경쟁을 강요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조직은 영어 협정문 번역도 제대로 못하면서 모든 국민에게 영어 사용을 강요하고, 자신은 불법과 편법을 밥 먹듯이 저지르면서도 법이니 시장이니 경쟁이니 떠드는 한국의 기득권세력과 같은 부류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채호 선생이 한탄한 것처럼 '조선의 공자가 아닌 공자의 조선'이 된 또 하나의 예를 보여주었다. 대학도 경쟁이 분명 필요하지만 그것은 나라와 대학을 살리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학생과 교수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태에서 '한국의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한국'이 되어버린 서글픈 현실을 목도한다.


경쟁을 신앙처럼 받드는 그들은 네명의 학생이 죽어도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고 항변한다. 도대체 몇명이 더 죽어야 하나? 지금 자라기도 전에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수십만, 수백만의 학생이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가? 본토의 것보다 더 무지막지한 경쟁주의, 시장주의를 신앙처럼 신봉하는 그들의 저 확신에 차 있는 단단한 머리를 어찌할 것인가?

                                                                                            2011.4.13 ⓒ 창비주간논평

Posted by 공고지

독서삼독

공감 2011. 1. 27. 11:05

 


책은 벗입니다. 먼 곳에서 찾아온 반가운 벗입니다. 배움과 벗에 관한 이야기는 『논어』의 첫 구절에도 있습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學而時習之不亦說乎).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가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수험공부로 맥질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독서는 결코 반가운 벗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빨리 헤어지고 싶은 불행한 만남일 뿐입니다. 밑줄 그어 암기해야 하는 독서는 진정한 의미의 독서가 못됩니다.

 독서는 모름지기 자신을 열고, 자신을 확장하고 그리고 자신을 뛰어넘는 비약(飛躍)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는 삼독(三讀)입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텍스트를 집필한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그 텍스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뿐만 아니라 필자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 발 딛고 있는지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처지와 우리시대의 문맥(文脈)을 깨달아야 합니다.

수험공부 다음으로 많은 것이 아마 교양을 위한 독서라 할 수 있습니다. 교양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를 일단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교양독서 역시 참된 독서가 못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을 가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양독서는 대개 고전독서이기도 합니다. 고전에 대한 이해는 물론 필요합니다. 고전은 인류가 도달한 지적 탐구의 뛰어난 고지(高地)들이고 그것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과거와의 소통도 어렵고 동시대인들과의 소통도 어렵습니다. 돈키호테와 햄릿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대화가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전은 언어와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지성 신영복(70)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2011년 새해를 축하하는 글과 서화(위쪽)를 중앙일보 독자들에게 보내왔다. 한국 현대사의 온갖 질곡을 몸으로 겪어온 신 교수는 이번 글에서 책과 삶, 그리고 사회의 의미를 반추하고 있다. [안성식 기자]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위한 소통이며 무엇을 위한 대화인가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돈키호테는 시대착오적인 어떤 중세기사의 이야기가 아니며, 햄릿은 덴마크 왕자의 개인적인 비극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탈 중세(脫中世)의 전개과정이나 인간 존재의 운명적 비극에 대하여 고뇌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교양이나 대화의 소재로 삼는 경우 자신을 확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가두는 것이 됩니다. 독서는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읽고 자기가 대면하고 있는 세계를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와 맺고 있는 사회역사적 관련성을 성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문사철(文史哲)을 공부하는 까닭은 그것을 통하여 깊이 있는 세계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서화(詩書畵)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문사철이 언어(言語), 개념(槪念), 논리(論理)로 인식하는 것임에 비하여 시서화는 이를테면 소리와 빛으로 소통하는 뛰어난 세계인식입니다. 문사철 방식에 비하여 시서화의 방식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경험하고 있는 급속한 미디어의 변화는 이 시서화의 세계마저 영상서사(映像敍事)로 바꾸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책과 종이 그리고 독서의 종말을 예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사철이든 시서화든 영상이든 그것은 우리들 자신과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정직한 이해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본질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경우든 인간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인식 그리고 우리들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핵심입니다. 그러한 성찰만이 우리의 삶을 보다 인간적인 것으로 키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영상서사는 그것의 뛰어난 대상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성찰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문학서사(文學敍事)가 요구하는 독자의 자신의 고뇌와 성찰이 사라지고 독자로 하여금 복제와 카피라는 대단히 안이한 자리에 나앉게 함으로써 우리들을 또 한 번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사의 장구한 지적 탐구를 통하여 키워온 그 치열한 성찰성에 주목하고 다시 한 번 독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책들이 반드시 당대의 최고의 지적탐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고전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사의 전개과정이 그러했듯이 앞으로의 모든 미래지향 역시 지금까지의 역사를 디딤돌로 하여 나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독서와 문학서사는 최근의 급속한 미디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발 딛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역사 그 자체이며 무형의 문화유산입니다. 언어 개념 논리라는 쉽지 않은 인식 틀을 키워온 인류의 정신사는 그것이 비록 세계인식의 최고형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류의 지적 탐구를 뒷받침해 온 탄탄한 초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의 핵심이 바로 성찰(省察)입니다. 성찰은 철학적 추상력(抽象力)과 문학적 상상력(想像力)을 양 날개로 하는 자유로운 비상(飛翔)이며 조감(鳥瞰)입니다. 이러한 비상과 조감을 가능하게 하는 생각의 재구성이 바로 성찰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여정을 내려다보는 창공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여정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성찰과 비상이라는 지적 여정을 이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독서,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갇혀 있는 문맥, 우리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트리고, 드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여정에서 길어 올려야 하는 우리들 자신에 대한 애정입니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더 좋은 책, 더 좋은 왕도(王道)는 없습니다. 한 마리 작은 새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이 그렇습니다. 어미 새의 체온과 바람과 물 그리고 수많은 밤들이 차곡차곡 누적되어 어느 날 아침 문득 빛나는 비상으로 날아오릅니다. 고뇌와 방황으로 얼룩진 역경의 어느 무심한 중도 막에 그 때까지 쌓아온 회한과 눈물이 어느 순간 빛나는 꽃으로 피어오릅니다. 독서도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떤 책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고뇌와 성찰의 작은 공간인 한 언젠가는 빛나는 각성(覺醒)으로 꽃피어나기 마련입니다. 언약(言約)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날 것입니다.

 독서는 만남입니다. 성문(城門) 바깥의 만남입니다. 자신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는 자신의 확장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확장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만남인 한 반드시 수많은 사람들의 확장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마치 바다를 향하여 달리는 잠들지 않는 시내와 같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각성이 모이고 모여 어느덧 사회적 각성으로 비약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文脈)을 깨트리고, 우리를 뒤덮고 있는 욕망의 거품을 걷어내고 드넓은 세계로 향하는 길섶에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굳이 새해의 일출을 보기 위하여 동해로 가지 않아도 됩니다. 일출은 도처에 있습니다. 반가운 만남과 성찰을 쌓아가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찬란한 일출은 있습니다. 새해의 빛나는 성취를 기원합니다.

사진=안성식 기자

◆신영복은 누구인가=한국의 대표적 진보 학자로 꼽힌다.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후진국 개발론’ ‘경제원론’ 등을 강의하다 스물일곱살이던 68년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됐다. 그는 통혁당에 가입한 적이 없었으나, ‘통혁당 지도간부’로 기소됐다고 한다. 대법원에서 무기형을 받고, 88년 가석방되기까지 20년 간 수감 생활을 했다. 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했으며 2006년 정년퇴임했다.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CEO를 위한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며, 한국 사회에 인문학 붐을 일으켰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2001년), 『더불어숲』(2003), 『처음처럼』(2007) 등의 책을 냈다.  

Posted by 공고지
 

[경향마당] 동해 명칭,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현재 나타나는 일본의 쇠퇴 조짐은 여러 측면에서 분석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의 역사를 전혀 반성하지 않고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 그 ‘협애한 이기주의’로 인하여 한국 및 중국 등 인근 국가들의 비협조와 반감을 초래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마찰과 충돌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다.


‘일본해’ 명칭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문제 역시 한국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명칭이며, 또 일본제국주의 시기에 한국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확정되었다는 점에서 이기주의적 일본 행태의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해’라는 명칭은 부당하다. 두 개 이상의 다수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해역을 어느 일방의 국가 이름만을 붙여 사용하는 경우는 사실상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있는 바다 이름은 아드리아해이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사이의 바다는 태즈먼해이다.


한편 일본과의 분쟁에 있어 현실적으로 중국의 지지 및 동의를 획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 중 ‘동해’라는 명칭이 이미 중국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가 ‘동중국해’라고 부르는 바다는 원래 ‘동중국해’가 아니고 ‘동해’이다(최소한 중국에서는 동해라 부른다). 따라서 중국의 입장에서는 자국에 이미 ‘동해’가 존재하고 있는데, 또 다른 ‘동해’라는 명칭에 대하여 지지하고 동의하기 어렵다.


또 우리의 입장만을 생각하고 동쪽 바다라는 의미의 ‘동해’ 명칭을 견지해나가는 것은 제3자의 눈에 일본이 한국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일본해’를 고집하는 것과 유사하게 비쳐질 수 있다. 우리도 중국의 ‘동해’를 ‘동해’로 불러주지 않고 ‘동중국해’라고 하지 않는가? 사실 방위 개념을 바다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동해’ 명칭에 대한 대안으로는 ‘동아시아해’ 혹은 ‘동아해(東亞海)’ 정도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일본은 한국이 그토록 반대하는 ‘일본해’라는 명칭을 스스로 거두고 다시 한국과 논의해야 한다. 일본이 그러한 태도를 취할 때 비로소 인근 국가의 신뢰를 얻고 진정한 우호관계가 세워질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진정한 공존’ 지향적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이야말로 일본이 다시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는 전기가 될 것이다.

                                                           소준섭 | 국회도서관 조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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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

[프레시안 books] 원풍모방 노동자의 <못 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고,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전무후무한 풍요를 누리고 있다. 도처에 먹고 입고 소비할 수 있는 상품들이 넘치고 넘친다. 도처에 쓰지도 않고 쓰레기로 버리는 상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천국이 따로 없다. 물론 반드시 돈이 있어야만 천국이다.

그러나 불과 몇 십 년 전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도처에 먹을 것이 없어 끼니를 거르거나 굶주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고깃국은 1년에 딱 두 번 설날과 한가위 때 구경할 수 있었다. 옷이 없어 누더기를 기워 입어야 했고 연필은 손가락으로 잡을 수 없이 닳을 때까지 쓰다가 볼펜 깍지를 연필에 끼워 사용하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1960년대, 1970년대 남한은 2010년의 북한이었다.

이런 풍요는 누가 만들었을까. 사람들은 박정희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런 풍요의 세계를 만든 사람들은 노동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1970년대 섬유 산업과 전자 산업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만들었던 부를 바탕으로 한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고, 오늘날과 같은 선진 공업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말이 여성 노동자들이 만든 '부'이지 그 과정은 가혹한 착취와 지옥같은 억압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실제 이들 여성 노동자들은 극심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군대식 노무 관리에 시달렸던 사실상의 임금 노예였다. 하루 열서너 시간씩 일해야 했고, 심지어는 '타이밍'이라는 각성제를 먹으며 2, 3일 철야를 밥 먹듯이 하고는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임금을 받았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자본주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공동체를 해체해야만 가능한 제도였다. 자본주의 임노동 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땅에 뿌리박은 농민 공동체, 마을 공동체를 가차없이 때려 부수고 공장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모래알 같은 임금 노동자들을 강제로 만들어 내야만 한다.

서구에서는 지주들의 울타리 치기 운동(인클로저 운동)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게 해서 양떼에 쫓겨 농토에서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수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농토에서 '해방'되어 공장으로 '자유'로운 노동자로 취업하였다. 물론 이것은 임금 노예의 길이었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고, 갈 데라고는 오로지 공장밖에 없는, 착취당할 자유밖에 없는 임금 노예들이 있어야 자본주의는 굴러갈 수 있다. '착취-피착취' 관계가 기본 구조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 공동체' '회사 공동체' '공장 공동체'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혹 그런 말을 쓰는 자본가나 정치가가 있다면 그 말은 사기꾼의 달콤한 교언영색이자 말장난이며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경제 개발 계획은 수많은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고, 1962년부터 1975년까지 그야말로 대탈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무려 750만 명에 이르는 농촌 인구가 대도시로 이주했다. 역사상 이처럼 짧은 시기에 이처럼 엄청난 인구가 이동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계집애'였기에 학교에도 가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이 '공순이'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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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 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김영주·김이정·이재웅·장남수 지음, 삶이보이는창 펴냄). ⓒ삶이보이는창
그런데 이런 노예와도 같은 공장 생활에서 이들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라는 희망의 공동체를 발견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신천지였다. <못 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삶이보이는창 펴냄)는 바로 그런 새로운 공동체였던 1970년대 민주 노동조합 가운데서도 그 강한 조직력으로 군사 독재 정권의 탄압을 가장 오래 견뎌냈던 원풍모방 노동조합 조합원의 이야기이다.

그냥 단순히 조합원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여성 노동자로 살았다는 것이 어떤 삶이었는지 그 기가 막힌 삶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황선금, 차언년, 이영자, 박순애, 양승화, 김오순, 양태숙 등 7명의 각기 다른 삶의 굽이굽이를 장남수, 김이정, 김영주, 이재웅이 구술 받아 정리한 글들로 엮어져 있다.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 더 다양하고 깊고 풍부한 것이 실제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이다. 구술 생애사는 한 개인의 역사이자 동시에 시대를 증언하는 생생한 시대사이기도 하다. 이 책의 첫 글을 읽으면서 아마도 어떤 사람은 필자처럼 콧날이 시큰해지고 애써 눈물을 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 지독한 가난과 계집애로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억울함, 그리고 어린 나이에 하고 싶은 공부도 하지 못하고 공장의 공순이로서 살아야 했던 이들의 삶의 고단한 행적은 우리 시대의 오디세이에 다름 아니다. 이 기록은 1970년대, 198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생생한 삶을 대변하는 일종의 사기 열전에 해당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만 구술 생애사 본래의 취지에 맞게 인터뷰 내용을 날 것 그대로 정리하는 수준에서 책을 펴냈으면 훨씬 더 생생했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장남수의 글과 앞에 있는 몇 사람의 생애사 정리를 제외하고 뒤로 갈수록 글의 생생함이 떨어지는 것은 이 책의 기획 의도인 구술 생애사를 다르게 해석하고 집필한 결과이지 않나 싶다.

이 책과 동시에 출판된 <원풍모방 노동운동사>(김남일 정리, 원풍모방노동운동사발간위원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와 함께 1970년대 노동운동에 대한 재조명은 특히나 지금처럼 노동운동이 더할 수 없이 침체와 고립에 빠져 그 어떤 돌파구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절실히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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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풍모방 노동운동사>(김남일 정리, 삶이보이는창 펴냄). ⓒ삶이보이는창
무엇보다도 우리가 다시 1970년대 민주 노조운동을 다시 불러내 얘기를 들어야 하는 까닭은 노동조합 운동이 공동체 운동, 그것도 생활 공동체 운동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새롭게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 공동체가 전제되지 않는 노동조합은 사실 미국의 노동조합처럼 일종의 사업 노동조합으로, 자본과 거래를 하는 '비즈니스 유니언이즘(business unionism)'으로 전락하고 만다. 노동 공동체고 뭐고 사라진 폐허 위에 돈다발만 오고가는 순전한 이익단체로 전락해버린 것이 미국의 노동조합들이며 불행하게도 한국의 노동조합이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노동조합이 새로운 공동체로서 자유로운 인간들의 상호부조 사회로 바꾸는 근거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누리고 또 평등과 사회 정의가 확립되는 새로운 사회의 맹아가 되지 못한다면, 사회 구조를 배우고 사회를 바꾸기 위한 학교가 되지 못한다면, 그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은 결국 노예의 노동조합과 노예 노동자일 뿐이다. 심하게 말하면 배부른 노동 노예들, 배부른 가축들, 배부른 기계일 뿐이다.

1970년대 민주 노동운동을 관통하던 가장 주요한 노동운동 이념은 그 근본 바탕이 공동체 이념이었다. 노동조합은 새로운 인간관계의 마당이자 새로운 공동체였다. 산업 선교와 가톨릭청년회의 소모임은 그 자체가 강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소공동체 운동체였다. 이 책에서 숱하게 나오는 증언처럼 소모임은 그 어떤 거창한 이념 학습의 조직이 아니었다. 그냥 일상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자신이 하나의 살아 있는 인격체로서 인정을 받고 인정을 하는 기초 공동체였다. 그에 바탕을 둔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가장 중요한 공동체로 발돋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노동운동뿐만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 시민사회 운동도 어느새 이런 공동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역사가 우리의 삶을 좀 더 성찰하게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라면 우리는 민주 노조운동의 거울을 다시 꺼내 들어야 할 때에 이르렀다. 한국 노동조합이 노동운동 조직으로서 거듭나려면 무엇보다도 1970년대 민주 노조운동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서 실천했던 공동체 운동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들의 새로운 인간관계와 새로운 모임으로서 노동조합이 재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협동조합을 비롯해 공제조합 등등 다양한 노동자 조직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 로버트 오웬이 "자본은 노동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펼쳤던 협동조합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은 많은 시사를 남겨준다.

1970년대 민주 노조운동은 한 사람의 노동 노예를 자유인으로 변혁시켰던, 공순이를 자랑스러운 노동자로 해방시켰던 인간 해방의 운동이었다. 억압과 착취의 인간관계를 사랑과 평화의 평등의 인간관계로 바꾸는 사회 해방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동체가 해체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애와 협동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던 공동체 운동이었다. 원풍모방 노동조합 조합원이었던 여성 노동자들이 원풍 이후의 삶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국가가 원풍을 비롯한 1970년대 노동 공동체를 깨부수고 또다시 노예의 삶을 강요했을 때 이들 여성 노동자들은 이것을 거부하고 자유인의 삶을 살아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이다. 이제 우리는 공동체를 해체한 국가를 해체하고 새로운 공동체 국가를 만들어야 할 때이다.

원풍모방 노동자들이 살아왔던 삶은 그런 삶이었고, 공동체 운동의 오래된 미래를 실천한 삶이었던 것이다.

/박승옥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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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국사회] 싸움엔 순서가 있다/ 김규항

 내가 두 해 넘게 지속해온 ‘우리 안의 이명박’ 이야기에 대해 여러 논평들이 있었다. 주목할 만한 건 역시 ‘사람들이 사회구조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회구조가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물론 사회구조가 사람을 만든다. 그러나 사회구조가 사람들을 만드는 일과 사람들이 사회구조를 만드는 일은 실은 하나다. 대통령이 아니라 최고경영자(CEO)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명박 정권이 탄생한 일과, 나라가 아니라 기업이 된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녹아나는 일은 하나이며 순환구조를 이룬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들 전자는 말하지 않고 후자만 말하니 나로선 고심 끝에 ‘우리 안의 이명박’ 이야기를 한 거였다.

그 비판엔 또한 ‘사회구조에 옴짝달싹 못하고 끼여 살 수밖에 없는 대중들의 욕망을 탓해서야 되겠는가’라는 점잖은 훈계도 들어 있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훈계에서 대중을 옹호함으로써 제 불편함을 면하려는, 말하자면 줄창 이명박만 욕하면서 손쉽게 정의롭고 진보적일 수 있는 민주화 이후 최고의 정신적 안락을 놓치지 않으려는 인텔리들의 낯간지러운 욕망을 느낀다. 분명히 밝히는바, ‘우리 안의 이명박’은 애초부터 대중에 대한 돼먹지 못한 윤리 설교와는 무관한, 전적으로 인텔리들, 특히 진보적 인텔리들을 겨냥한 이야기다.


‘우리 안의 이명박’ 이야기는 교육문제에 대한 내용이 뼈대를 이룬다. 이를테면 ‘이명박의 시장주의 교육을 욕하면서 제 아이의 시장 경쟁력은 알뜰히 챙긴다’는 내용을 보자. 그건 이른바 ‘2외2공 현상’과 관련한 것이다. ‘2외2공 현상’이란 <고래가 그랬어> 식구들이 만든 풍자어로, 한국엔 아이를 일찌감치 외국에 보내거나 적어도 외고에 보내는 부모들과 아이를 학원에 보내기도 어려워 공부방에 보내다 결국 공고에 보내는 부모들이 있다는 것이다. 정치계와 언론계와 학계에 몸을 두고 문화자본을 행사하는 진보 인텔리들의 아이들은 ‘2외’에 속할지언정 ‘2공’에 속하진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소리쳐 이명박의 교육정책을 욕하고 학벌주의를 개탄해봐야 대중들에겐 감흥이 없다. ‘저 사람들 말은 저렇게 하면서 제 자식은 감쪽같이 빼돌리지’ 하는 것이다.


‘2외’를 벗어난 진보 인텔리 부모들의 관심은 대안학교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은 한국의 대안학교들을 거지반 망가뜨려 놓았다. 그들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다. 그들은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아니라 ‘얼마짜리’가 되는가가 목표가 되어버린 교육현실을 뛰어넘어 아이의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까다롭고 섬세한 그들의 취향을 자꾸만 거스르게 하는 공교육 현장을 우회하여 대학에 들어가길 바란다. 말하자면 그들이 대안학교에 기대하는 건 ‘대안적 삶’이 아니라 ‘대안입시’다. 대중들이 대안학교를 ‘귀족학교’라 비아냥거리게 된 건 단지 학비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중적 탐욕에 분이 나서다.


이명박 정권과의 싸움이야 너나가 있겠는가. 인간성을 간직한 모든 사람이 힘을 모아 싸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안의 이명박’과의 싸움은 경우가 다르다. 이 싸움엔 순서가 있다. 누가 먼저 싸워야 할까. 모든 아이들이 모든 아이들을 상대로 싸우는 이 참혹한 검투장을 누가 먼저 탈출할 수 있을까. 대학을 못 나와서 사람대접 못 받았고 먹고살기 힘들었다는 한을 가진 부모들이 먼저 싸워야 할까. 일류대학을 나와서 반체제 운동 할 때조차도 유리했던,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먹고사는 일엔 절박함이 없는(진보 인텔리) 부모들이 먼저 싸워야 할까. 이건 이념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염치와 자의식의 문제다.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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