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길을 떠나며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납니다.

먼저 화계사 주지 자리부터 내려놓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는 남은 인생을 초심으로 돌아가 진솔하게 살고 싶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초심 학인시절 어른 스님으로부터 늘 듣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그런 중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칠십 팔십 노인 분들로 부터 절을 받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


환경운동이나 NGO 단체에 관여하면서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록 정치권력과 대척점에 서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원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재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을 보면서 제 자신의 문제가 더욱 명료해졌습니다.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지금의 제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제 자신의 생사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살면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할 것 같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것 내려놓고 떠납니다.

조계종 승적도 내려놓겠습니다.

제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겠습니다.

번다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습니다.

                                         2010년 6월 14일 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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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고지

재상의 셋방살이 -

공감 2010. 5. 25. 09:49
 

재상의 셋방살이 

                                                        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이익(李瀷, 1681-1763)은「성호사설」의「재상임옥(宰臣賃屋)」(24권), 곧 ‘재상이 셋집을 빌어 살다’란 제목의 글에서 송나라의 희한한 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재상의 아들은 과거를 칠 수 없도록 제한하는 제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아버지가 총리나 장관을 지내면, 아들은 행정고시를 치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좀 더 넓혀본다면 아버지가 국회의원이 되면, 아들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것이니, 똑똑한 자식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지만, 그 제도야말로 원려(遠慮)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재상의 아들이 관로에 들어서는 것을 허락한다면, 권력을 독점한 가문이 생겨날 것이고, 그것은 결국 국가와 사회에 유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익이 이런 말을 하는 속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몇몇 가문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대제학을 독점하는, 국가권력의 사유화가 노골적으로 진행되던 시대였고, 그것이 국가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직의 독점과 국가권력의 사유화가 나라를 병들게


이익은 재상의 아들에게 과거를 치지 못하게 한 예로서, 여몽정(呂蒙正)의 아우 여몽형(呂蒙亨)과 이방(李昉)의 아들 이종악(李宗?)이 정시(庭試)에서 합격했지만, 형 또는 아버지가 재상으로 있다 하여 불합격 처분을 한 경우를 들고 있다. 제도는 실제로 집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익은 이 외에도 몇몇 예를 더 들고 있지만, 골자는 간단하다. 재상의 아들 개인은 억울할 수 있지만, 국가는 보다 폭 넓게 인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이익의 견해다.

이익은 같은 글에서 당시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자기의 집이 없어, 재상일지라도 수도 개봉(開封)에서 집을 짓지 못하고 셋집을 얻어 살았다고 한다. 권력이 소수의 가문에 집중되지 않고, 또 재상이 셋집에 살 정도로 깨끗하였으니, 사방에서 우수한 인재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정에는 명분이 섰고 일처리도 공정했다는 것이 아닌가.


이익이 높이 평가하는 그 시대는 북송 초기다. 이익은 6대 신종(神宗) 때부터 재상이 개봉에 호화스러운 저택을 짓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지방의 인재가 조정으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과야 익히 아는 바이다. 힘을 잃은 송나라는 요나라 금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시달려 재정이 바닥난다. 국토를 빼앗긴 것은 물론 개봉까지 함락되고, 급기야 황제인 휘종 흠종까지 만주 오국성(五國城)으로 잡혀가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맞는다.(하기야, 무능한 황제가 죽은 것이 무슨 대단한 비극이겠는가마는!)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특정한 학교의 졸업자가 관료와 국회의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 결과가 어떤지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아시리라 믿는다. 더욱 갑갑한 것은 지역구 국회의원 역시 대부분 해당 지역의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역에서 경력을 쌓고 주민의 인정을 받아 의원으로 선출되어 국회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난데없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서울 사람이 이 지역과 과거에 어떤 인연이 있었노라면서(대부분 개미허리보다도 빈약한 관계다) 불쑥 나타난다. 그리고는 힘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번지레한 말로 표를 낚아 국회의원이 된다. 그들이 과연 지역을 위해 성실히 일했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지방이 이처럼 쭉정이가 되었을까?


              부자나 권력독점집단보다는 셋방살이 정치인을


이익은 글의 말미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만약 백성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려면, 무엇보다 먼저 사치를 억제해야 한다. 사치를 억제하는 방법은 현자(賢者)를 찾아내는 데 있다. 현자를 찾아내는 방법은 사욕(私欲)을 막는 데 있다. 사욕을 막는 방법으로는 송나라 제도보다 좋은 것이 없고, 효과도 이미 분명하다.”


요즘 대한민국 사정으로 풀어보자면 이러하다. 국민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해 주려면, 돈 많은 부자 정치인의 진출을 막아야 하고, 혈연?지연?학벌에 의한 소수의 권력 독점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어보자. 돈 많은 부자 정치인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겠는가. 또 정치권력을 독점한 소수의 혈연?지연?학벌 집단이 과연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치인의 정계 진출을 바라겠는가. 강남에 빌딩이며 아파트를 소유한 고급관료가 부동산 가격이 떨어질 정책을 세우겠는가? 아마도 셋방살이를 하는 정치인이 대거 출현하지 않고는 대한민국의 국민은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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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초등학교 운동회를 보면서 / 이계삼


 학교 2층 복도를 지나다가 옆 초등학교 운동회 하는 모습을 넋을 놓고 보았다. 옛날 같은 운동회였다. 키보다 더 큰 공을 굴려가는 꼬마 아이들의 종종걸음이 앙증맞은데,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엇갈리는 소리는 새떼들의 지저귐처럼 청아했다. 신나게 1등으로 내빼는 아이 한참 뒤에 비만의 소년은 낑낑대며 따라간다. 훌라후프를 떨어뜨린 소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눈치를 살피다 몰래 후프를 주워 다시 시작한다. 아무도 못 봤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멀리서 내가 봤다, 이눔아.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하늘은 맑았고, 새잎 돋아나는 나무들은 온통 싱그러웠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2층 복도로 올라오기 직전에 나는 교무실 내 자리 위에 놓인 <한겨레21> 표지사진을 보았다. 가슴속으로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가 보라, 4대강’이라고 큼직하게 쓰인 표지 전면에는 여주군 부근의 남한강을 찍은 사진이 박혀 있었다. 뒤통수 한가운데로 바리캉이 밀어놓은 가르마처럼 강 한가운데로 흉측한 길들이 뻗어나 있었다. 갇힌 쪽은 온통 흙탕물이고, 흐르는 쪽은 암청색이었다. 억겁의 세월을 흘러온 강이 한순간에 결딴나 버렸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다, 인간 어뢰가 터졌건, 꽃게 어뢰가 물어뜯었건, 북한이 아니면 누가 했겠냐면서 사냥개 같은 이빨을 갈아대는 자들이 지금 물이 올랐다. 한판 붙자는 얘기다. 전교조는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선거 때마다 도마 위에 오르는지, 그렇게 모욕을 주지 못해 상처를 내지 못해 안달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학창시절 전교조 선생님들로부터 받은 감동으로 교사의 꿈을 키웠던 사람이다. 일년 내내 회의하고, 아이들 잘 가르치기 위해 연수하고, 탄압받아가며 맞서 싸운 일밖에 한 것이 없는데, 그것조차 제대로 하질 못해 아이들한테 미안할 따름인데, 우리가 간첩질이라도 했단 말인가.


올해 면 소재지에 있는 학교로 옮긴 아내는 퇴근하고 집으로 오면 부쩍 애가 타는 소리를 한다. 자기 반 19명 중에서 ‘정상 가정’이라 할 수 있는 아이가 예닐곱밖에 되질 않는다 한다. 시골 학교는 대체로 이렇다. 오늘도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가 키우는 한 아이가 할머니 돈 13만원을 훔쳐 게임머니로 쓰다 걸린 것이다. 이혼한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아들을 때린다는데, 게임머니를 훔친 그 아이는 그 마을에서 하나밖에 없는 초등학생이라 한다.


우리는 세상 전체를 구원할 수 없다. 세상에 가득 찬 이 어둠을 우리 힘으로 걷어낼 수도 없다. 이 어둠은 어제오늘에 만들어진 것도 아닐 것이며, 거기에는 저 사기꾼, 협잡꾼, 모리배들만의 책임으로 덧씌울 수 없는, 우리들 하나하나의 크고 작은 책임들이 서려 있을 것이다.


결딴나는 강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수녀님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내 주변에도 지율 스님이 찍은 4대강 사진전을 위해 이젤과 사진들을 트럭에 싣고 다니며 시내에서 사진전을 하는 형님들이 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무력감이다. 이 광막한 어둠이 주는 슬픔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자괴감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


초등학교 운동회를 보면서 잠시나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이 엉망진창의 세상 속에서도 아이들이 뛰놀고 자란다는 사실이 주는 싱그러운 기쁨이었다. 기운 차려서, 뭐라도 더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나는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떳떳함만 지녔다면 병신이어도 좋겠다던, 양복을 입지 않아도, 장가를 가지 않아도, 세 끼 보리밥을 먹어도 종달새처럼 노래하겠다던 권정생 선생님을 생각했다.

                                               »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Posted by 공고지

우리시대의 역설

공감 2010. 3. 20. 11:49
 

우리시대의 역설

 -제프 딕슨-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피우며

너무 늦게까지 깨어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적게 책을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너무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

말은 너무 많이 하고

사랑은 너무 적게 하며

거짓말은 너무 자주 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외계를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안의 세계는 잃어버렸다

공기정화기는 갖고 있지만 영혼은 더 오염되었고

원자는 쪼갤 수 있지만 편견을 부수지는 못한다.

자유는 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어들었다.

키는 커졌지만 인품은 왜소해지고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관계는 더 나빠졌다.

세계평화를 더 많이 얘기하지만 전쟁은 더 많아지고

여가시간은 늘어났어도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다.


더 빨라진 고속철도

더 편리한 일회용 기저귀

더 많은 광고전단

그리고 더 줄어든 양심

쾌락을 느끼게 하는 더 많은 약들

그리고 더 느끼기 어려워진 행복.


Posted by 공고지
 

촌사람의 서울 구경 

                                                       

                                          정 지 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촌사람이 모처럼 서울에 올라갔다가 경복궁 역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역까지 가면서 창 밖으로 달라진 서울의 모습을 구경하게 되었다. 우선 눈에 띈 것은 거대한 성벽 같은 차단막에 가려져 있는 광화문 복원공사장의 모습이었다. 수많은 모자이크판으로 구성된 차단막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임을 애써 강조하고 있었지만 인왕산, 북악산의 스카이라인을 깨뜨리는 평지돌출의 인공구조물임을 감출 수는 없었다.


다음에 눈에 들어온 것은 광화문 광장의 북쪽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스케이트장이었다. 흥겨운 음악 소리에 맞추어 수많은 사람들이 도심 한복판에서 스케이트와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광경은 마치 환상 속의 놀이터인 양 멋져 보였다. 디즈니랜드의 한 부분을 세종로로 옮겨놓다니! “하늘에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그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그들은 외치고 있었다.


스케이트장에 이어 거대한 세종대왕의 좌상이 나타났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대왕은 이순신 장군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세종대왕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초라하게 보이는 이순신 장군은 물끄러미 유리상자 속에 쌓아올린 시커먼 고철덩어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만에야 그것이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보여주기 위한 비디오 수상기와 기계장치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버스는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가는 중이었다. 멀리 청계천 광장 쪽에서 나의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기묘한 물체가 나타났다. 나선 달팽이 모양의 그 조형물은 말로만 듣던 올덴버그의 ‘스프링’이라는 작품이었다. 보아하니 수월찮은 돈이 들었을 그 작품은 엉뚱하고 도발적이라는 점이 인상적일 뿐, 주변의 경관이나 시각적 맥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광화문 광장의 스케이트장과 세종대왕 좌상, 이순신 장군 동상, 백남준의 비디오 기계는 도대체 무슨 문화적 맥락과 역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걸까? 놀이동산과 분수, 역사조형물, 시각예술을 나란히 배치한 것은 퍼스트모더니즘의 혼성모방 기법인가? 아니면 우리도 이만큼 잘 살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천박한 키치문화의 시각적 표현인가?


                       다름 아닌 대한민국 문화의 시각적 표현


허기야 우리는 30년만에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건너뛰면서, 봉건적 유산과 서구적 가치가 뒤섞여 있는 혼성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세계 20대 선진국의 하나임을 자랑하면서도, 6백년전의 경국대전을 근거로 서울이 대한민국(조선이 아니다)의 수도임은 관습헌법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오는가하면,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내렸다고 정치인과 언론, 극우단체가 판사들에게 폭력과 협박을 일삼고 있지 않은가. 나는 버스에서 내리면서 결국 세종로의 기괴한 시각적 조형물들은 대한민국 문화의 시각적 표현임을 깨달았다.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

고단한 민중의 역사

허리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군림하는 자들의 배 부른 노래와 피의 채찍 아래

마른 무릎을 꺾고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왔지

우린 너무 오래 참고 살아왔어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

아~ 대한민국 아~ 대한민국


Posted by 공고지